나무는 단순한 개체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
신준환
동양대학교 산림비즈니스학과 교수
나무가 숲을 일궈내는 것은 세계와 세계의 마주침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신비롭다 못해 성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는 햇빛이 비치는 파란 하늘에 맞춤한 모양으로 자라다가 이웃 나무가 커오면 서로 맞춤하게 햇빛과 빗물을 나누어 가진다. 그러다 높이가 달라지면 살 것은 번성하고 사라질 것은 쇠락하며 많은 생물이 다양하게 살아가는 숲을 이룬다.
우리는 이런 나무의 자세를 관찰하며 나무에 어떤 성스러운 힘이 있어 저렇게 위대한 세계를 이루어내는지 탄복하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 ‘위대한 성자’와 같은 표현으로 나무를 사람에 비기며 닮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좀 더 관찰해보면 이런 일은 나무가 사람 같은 자아의식을 가지고 성스럽게 일궈내는 일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인간도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자아의식을 강화해 위대한 자가 될 수 있도록 심신을 단련해야 할 것이다.
나무가 숲이 되는 과정은 나무가 개체로 이뤄가는 일이 아니다. 얼핏 보면 멋있게 자라는 줄기가 중심을 잡아주어 숲을 이루는 것 같지만, 차근차근 관찰해보면 사소하게 느껴지는 지엽 말단들이 서로 맞춤하게 자리 잡는 과정을 통해 숲을 일궈낸다. 이것은 저속도 촬영 기법으로 보면 마치 하늘에 펼쳐지는 새들의 군무나 물속에 일렁이는 물고기 떼의 유영과도 같다. 그래서 나무와 나무의 만남은 개체의 만남이 아니라 세계와 세계의 마주침이다. 더구나 흘러가는 군무나 유영이 아니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서사시처럼 역사를 새겨낸다.
우리는 남을 받아들일 때만 세계를 이해하는 존재
나무에서 줄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욕심일 뿐 생태계는 지엽 말단으로 일을 한다. 나무 한 그루가 죽는 것도 줄기 하나가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지엽 말단이 이룬 세계가 스러진 것이고, 거기에 따라 다른 세계가 마중을 나오는 것이다. 나무의 줄기는 지엽 말단을 연결하는 타래일 뿐이다. 나무를 개별자로 보지 않고 세계로 이해하면 나를 제대로 이해할 때 도움이 된다. 나는 나무줄기처럼 견고한 자아가 이루고 있는 개별자가 아니라 지엽 말단의 세계처럼 여러 관계가 만나고 스러지는 연결망의 군무이다. 자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웃이 중요하다. 지엽 말단이 숲을 이루듯이 이웃과의 만남으로 내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에 머물러도 안 된다. 뭔가를 만났을 때 내가 발현된다고 해서 우리가 나를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웃이 어디까지 연결되는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진화 과정에서 나를 보존하도록 단련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습관처럼 내가 아닌 남을 두려워하고 우리 집단이 아니면 배척하는 성향을 띠고 있다. 그러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과정을 밟아야 한다. 우리는 나를 내세워서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고 남을 받아들일 때만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다.
문제는 인간은 나와 가까운 존재는 좋아하고 나와 다른 존재는 싫어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나와 다른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될 존재로 생각해 지워버리려고 하지만 마음대로 안 되니 더 심하게 군다. 그러나 내가 있다는 것은 남이 있다는 것이다. 나를 이해하는 자들만 함께하면 나는 점점 나에게만 집착하게 된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을 포용해야 아집에 속박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이해받기만 원하지 말고 내가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밝은 하늘과 어두운 땅속처럼 극단적 다른 의견도 존중 필요
막대자석을 아무리 잘라도 극성이 없어지지 않듯이 극과 극은 원래 한 묶음이다. 다시 나무를 보자. 우리는 밝은 하늘 아래의 나무를 찬양하지만, 나무는 유기물이 썩어가는 땅속에 뿌리를 뻗고 자란다. 밝은 하늘과 어두운 땅속처럼 극단적으로 다른 의견도 존중하자. 그것이 아집에서 벗어나는 길이고 그만큼 내가 더 커지는 길이며 세계로 접속하는 방법이다.
하늘과 땅은 서로 말을 섞지 못할 정도로 다르다. 땅속은 컴컴하고 하늘은 훤하다. 서로 말이 되는가? 땅에서 물은 흘러가지만, 하늘에서 물은 떠다닌다. 말을 섞기 불가능하다. 그래도 맥락에 따라 물은 수증기로 바뀌고, 수증기는 물로 바뀐다.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거나 동일성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나무의 지엽은 파란 하늘에서 내리는 햇빛 속에 행복해 보이고, 나무의 가는 뿌리는 깜깜한 흙 속에 묻혀 있어 우울하게 보이는가? 나무의 지엽과 가는 뿌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일까? 광명한 세계에 있는 지엽도 가는 뿌리에서 물을 올려보내지 못하면 시들게 되고, 가는 뿌리도 지엽에서 만든 탄수화물을 보내지 못하면 썩을 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은 이웃이 어디까지인지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르고 있지만, 나무는 어떻게 세계를 연결하는지 어떻게 세계가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대로 밝고 그대로 깊은 나무를 본받자.
신준환
서울대학교 산림자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립수목원 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동양대 산림비즈니스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다시, 나무를 보다』, 『나무의 일생, 사람의 마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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