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세계를 떠난 열반은 없다 |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 A에서 Z까지

현실 세계를 떠난
열반은 없다
- 깨달음이 곧 열반

화령 정사
불교총지종 정사, 보디미트라 ILBF 회장


열반에 대한 다양한 정의
열반은 불교의 궁극적 목표로서 활활 타오르던 탐진치의 불꽃이 수행에 의해 잠잠하게 꺼진 상태를 말한다. 경전에서는 열반을 정의해 ‘탐욕이 멸하고 진에가 멸하고 우치가 멸한 것, 이것을 열반이라고 한다’고 설하고 있다. 즉 탐진치의 삼독의 번뇌가 완전히 멸해 마음이 안온하고 평화로워진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모든 괴로움이 없어진 상태가 열반이다.

『잡아함경』에서는 열반의 정의에 대해 이렇게 나열하고 있다.

무위(無爲), 구극(究極), 무루(無漏), 진제(眞諦), 피안(彼岸), 미묘(微妙), 극난견(極難見), 불로(不老), 견뢰(堅牢), 불괴(不壞), 불가설(不可說), 불희론(不戱論), 무장애(無障碍), 적정(寂靜), 불사(不死), 극묘(極妙), 정복(淨福), 안온(安穩), 애진(愛盡), 희유(稀有), 미증유(未曾有), 무재(無災), 무재법(無災法), 이것이 열반이라고 선서(善逝)께서는 말씀하셨다.

여러 가지 열반의 정의 가운데에서 먼저 열반을 무위라고 표현한 것이 있다. 이것은 괴로움을 초래하는 업을 짓는 것이 더 이상 없다는 뜻이다. 열반은 윤회의 굴레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더는 번뇌를 일으키는 행위가 없게 된다. 구극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열반보다 더 나은 것은 없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다. 그리고 무루는 더러운 번뇌를 말한다. 열반은 그 번뇌가 다 소멸된 것이기 때문에 무루라고 한 것이다. 진제는 열반이야말로 참된 진리라는 뜻이다. 세간법인 속제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열반은 변함없는 진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피안은 괴로움의 이쪽 언덕에서 안온한 깨달음의 저쪽 언덕으로 건너갔다는 뜻인데 열반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흔히 도피안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 다음으로 열반을 미묘라고 표현하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훌륭한 것이 열반이라는 의미이다. 극난견이라는 것은 열반의 경지는 매우 도달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불로는 불사와 마찬가지로 늙고 죽음의 경지를 초월해 있다는 뜻이다. 견뢰는 다음에 나오는 불괴와 거의 같은 뜻으로 열반의 경지는 견실해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변하고 허물어지는 것은 세간의 유위법이지만, 열반은 견고해 변함이 없는 무위법이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을 쓴 것이다. 또 열반을 불가설이라고 하고 있다. 열반의 경지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직접 체득해봐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떤 음식이 아무리 맛있다고 설명해줘도 직접 먹어보지 않고는 그 진정한 맛을 모르는 것과 같다. 혹은 누군가가 장엄하고 감격스러운 장면을 보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 그때의 그 감동을 아무리 잘 설명해줘도 그 사람은 남이 보았던 그런 광경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것과 같이 열반의 경지도 스스로 체득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불가설이라고 말한 것이다. 불희론이라는 것은 헛된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열반은 죽어야만 체험할 수 있는 우리의 경험과 지각을 넘어선 세계도 아니고, 단순한 형이상학적 논의의 대상도 아니라는 뜻이다. 누구나 바른 견해를 지니고 수행을 하면 체득할 수 있는 그런 경지이기 때문에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무장애라는 것은 어떠한 구속과 속박에서도 자유자재한 경지가 열반이라는 뜻이다. 생로병사를 비롯한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절대 자유의 경지가 바로 열반이라는 의미이다. 적정은 번뇌의 불길이 다 꺼져서 더 이상 흔들림이 없는 고요한 경지를 말한다.

불사는 불로와 같은 의미이다. 태어남과 죽음의 경지를 이미 초월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죽음은 없다는 뜻이다. 우리의 무명과 헛된 망상에 의해 만들어진 삶과 죽음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여실지견(如實知見)에 의해 그 실상을 드러냄으로써 윤회를 벗어난 것이 불사의 경지이다. 감로는 더할 나위 없이 안온하고 편안한 경지라는 의미이다. 갈애의 불꽃으로 목이 타들어갈 때 시원한 물로 축여주듯이 열반은 더 이상 탐욕과 집착의 갈증이 없는 경지이다. 극묘라는 말은 극히 미묘한 경지라는 뜻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하고도 묘한 경지가 열반이라는 뜻이다. 정복은 한 점의 번뇌도 없는 참된 복을 누리는 것이 열반이라는 의미이다. 세간복은 다할 때가 있지만 열반에 의해 누리는 복은 끝이 없으며 가장 뛰어난 복이다. 안온은 편안하고 흔들림이 없는 경지가 열반이라는 의미이다. 애진은 애욕이 다한 것이 열반의 경지라는 뜻이다. 애는 갈애로 탐진치를 말한다. 그리고 이 갈애의 밑바탕에는 무명이 자리 잡고 있는데 지혜에 의해 무명이 멸해지고 탐욕과 집착의 갈애가 다한 경지가 곧 열반이다. 희유라는 말은 미증유라는 말과 비슷한 개념으로 아주 드물다는 뜻이다. 열반의 경지는 누구나 쉽사리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완전한 열반은 부처님만이 증득하셨다. 이것은 그만큼 우리 중생의 무명의 뿌리가 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열반의 경지는 부처님처럼 특출한 지혜를 지니신 분에게나 가능한 드문 일일뿐더러 역사상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일찍이 없었던 일이기 때문에 미증유라고 한 것이다. 또 열반을 무재라고 한 것은 모든 재난이 없는 경지가 열반이라는 뜻이다. 열반은 생로병사와 온갖 괴로움을 벗어났고 더 이상 업의 구속을 받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재난도 더는 닥치지 않는다. 모든 괴로움을 초월했기 때문에 무재라고 하는 것이다. 무재법이라고 하는 것은 괴로움을 초월한 경지를 드러낸 것이 열반이라는 뜻이다.

열반은 진리를 자각하고 실천에 의해 얻어지는 절대 안온의 경지…
생사가 열반이요 열반이 곧 생사
열반의 경지는 말로도 나타낼 수 없고 지극히 미묘하며 증득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형이상학적인 헛된 논의의 대상은 아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결코 죽어서 아무것도 없게 되는 회신멸지의 상태가 아니라 진리를 자각하고 실천에 의해 얻어지는 절대 안온의 경지이다.

우리의 현실을 떠난 열반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사가 열반이요 열반이 곧 생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의 현실 세계 가운데에서도 열반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번뇌가 있고 생사가 있기 때문에 열반이 있다. 열반의 진정한 의미는 부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붓다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80세로 입멸하실 때까지 늘 열반의 상태로 계시면서 교화를 하셨다. 열반이 반드시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석가모니부처님의 이러한 열반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겠는가?

붓다께서 말씀하신 열반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탐진치 삼독이 없어진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지혜에 의해 무명을 제거했을 때에 얻어지는 절대 평안의 경지이다. 그리고 그 경지는 우리가 사는 이 현실 세계를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세계가 바뀜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열반을 얻은 성자에게는 이 세계가 그대로 불국토
지혜로써 무명을 밝히게 되면 마음에 장애되는 것이 없고, 장애가 없게 되면 두려워할 것도 없으며, 모든 잘못된 망념을 여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열반에 이른 부처님께서는 무애자재로써 오직 중생 제도에 전념할 따름이다. 밀교의 경전인 『대일경』에서 ‘방편을 구경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도 성불의 궁극적 경지가 바로 중생제도를 위한 방편의 활용에 있다는 뜻이다. 열반을 얻은 성자에게 있어서는 이 세계가 그대로 불국토이다. 불국토가 객관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깨침을 얻은 자의 마음의 상태가 변하기 때문에 불국토가 나타난다. 너와 나의 분별도 없어지고 집착하고 두려워할 아무것도 없어지기 때문에 깨닫는 순간 이 세계는 그대로 불국토로 변하게 된다. 그러한 마음이 확대되어서 무명 중생에게까지 미치는 것이 자비이다. 우리는 이러한 깨달은 성자들의 자비에 의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해가고 있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이자 이상은 무주처열반
대승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열반에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라는 것이 있다. 생사에도 머무르지 않고 열반에도 머무르지 않는 무애자재의 경지가 이 무주처열반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이자 이상은 바로 이 무주처열반이며, 깨달아서 무주처열반에 머무르는 분들은 어떠한 걸림도 없이 오직 자비로써 무명 중생에게 지혜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삶은 바로 이 무주처열반을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는 사성제의 가르침을 통해 이러한 열반의 의미를 파악해 수행의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한다. 병을 다스리는 원리를 사성제에 비추어볼 때 멸성제는 병이 없어진 건강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열반이다. 즉 열반이라는 것은 괴로움의 굴레를 벗어나 건전한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현재의 삶은 모두 건전하지 못한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우리의 삶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망의 세계를 만들어놓고 거기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열반은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경전에서 열반의 상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은 없다. 열반이라는 것은 직접 체험해봐야 알 수 있는 실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사성제를 통해 이론적으로나마 열반의 의미를 유추해봄으로써 건강하지 못한 삶에서 건강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 멸성제를 잘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도달해야 할 궁극의 목표를 분명히 인식하게 되고 그에 따라 고성제와 집성제, 그리고 마지막의 도성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화령 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교총지종 교육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보디미트라 ILBF(국제재가불교포럼) 회장으로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 『불교 교양으로 읽다』, 『담마빠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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