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의 청기와, 홍천 수타사 | 문화재의 시선으로 보는 절집 이야기

경복궁 근정전
청기와의 600년 인생

홍천 수타사


홍천 수타사 대적광전 지붕 위 쌍둥이 청기와
미시령을 굽이굽이 타고 넘는 저 바람은 서울에서 불어오는 걸까, 동해에서 불어오는 걸까. 후덥지근한 여름 바람 끝에 가을이 느껴진다. 오늘도 대적광전 지붕 위에서 바라보는 흥화루와 봉황문은 아름답게 서 있고, 하늘은 무심하게 높아져가는데 나는 요즘 유독 옛 생각이 난다.

“내가 오던 날을 기억하시오?”

이 절집에서 그래도 오래되었다 싶어 원통보전에 들어앉아 있는 목조관음보살(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6호)에게 물었더니 자신은 1758년에 들어앉았으니 나보다 늦게 태어나 잘 모른다 했다. 생각해보니, 그 관음보살을 만들겠다고 조각승 순경 스님과 덕순 스님이 256명의 시주를 받는 것을 내가 봤다. 나보나 나이가 어린 것이 맞다.

그의 짐작대로 자신의 복장 유물로 발견되어 모셔져 있는 부처님 진신사리에게도 물어보고, 대적광전 닫집에서 발견된 진신사리에도 물어봤지만 그들은 ‘기억할 필요가 없으니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라며 그저 미소를 지었다.

“검은 기와들 정가운데에서 반짝반짝 햇빛에 청아하게 수백 년을 빛나고 있건만 왜 옛 생각이 나시오?”

경복궁 근정전
내가 있는 수타사 대적광전의 영산회상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2호) 속 석가모니불이 물었다. 철로 만든 비로자나불과 화려한 천장(닫집)의 봉황과 비천, 황룡도 의아해하며 물었다.

우리 둘, 대적광전 지붕 위 가운데에 얹힌 쌍둥이 청기와는 가만히 눈을 감고 평정심을 찾아 명상에 잠겼다.

그리고 그때 떠올랐다. 우리의 고향.

수타사 청기와 출생의 비밀
“내 고향은 경복궁 임금의 머리 위, 근정전 지붕”
‘인생 새옹지마’라는 말이 반드시 사람에게만 맞는 말은 아니다.

내가 태어나 눈을 떴을 때는 1395년 경복궁 근정전 지붕이 완성되던 날이었다. 근정전은 조선의 첫 번째 왕이었던 태조 이성계가 1392년 7월에 왕위에 오르고 나서 경복궁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조선의 법궁’으로 짓고 국왕의 즉위식이나 왕의 정무를 보거나, 큰 행사를 치를 때 쓰려고 만든 경복궁 본전이다.

한마디로 나는 왕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던 ‘왕궁의 청기와’였다.

대적광전 청기와가 바라본 삼라만상
여기 강원도 홍천 수타사로 온 것이 240년쯤 뒤인데 그때까지 우리 쌍둥이 청기와는 근정전 지붕 위에서 너무나 많은 삼라만상을 보았다.

불교를 사랑했던 세종대왕의 비, 소헌왕후가 세상을 등지고 세종도 몇 해 안 되어 세상을 등졌을 때, 그의 맏아들 문종은 3년 상을 연이어 치르며 쇠약해져갔다. 하지만 문종이 즉위했던 1450년엔 그래도 기운이 있어, 대신들에게 부모를 천도하는 의미로 어느 사찰엔가 전각 지붕에 청기와를 덮자고 했는데 신하 정지하가 ‘청기와는 굽고 만드는 데 너무 큰돈이 들어가서 경복궁 근정전과 사정전에만 덮는 것인데 무슨 말씀이냐, 아예 절을 짓지 말라’고 반대해 문종이 알겠다고 일을 접었던 적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문종실록』 문종 즉위년 경오 1450년 2월 28일 기록) 그만큼 이 몸은 왕궁에서도 귀한 곳에만 얹던 몸이었다.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내 삶은 고되었다.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39세에 약한 몸을 버리고 하늘로 갔을 때, 11세였던 아들 단종은 혼자였다. 단종을 낳을 때 산후 후유증으로 사망한 현덕왕후에 이어, 조부모와 아버지마저 잃었으니 어린 단종은 혈혈단신이었다. 김종서 같은 대신들의 보좌를 받았지만,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실권을 뺏기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났고, 그 후 궁녀들은 단종이 영월에서 살해당했다고 수군댔다. 그 후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세조는 죄책감에 불사를 많이 했고, 정희왕후와도 금슬이 나쁘지 않았지만 피부병과 온갖 신경증으로 고생하며 살다 세상을 등졌다. 이후 내가 정신이 혼미해진 것은 연산군부터였고, 광해군에 이르러서는 근정전 앞마당에 언제 피가 흩뿌려질까 두려운 나머지 기억이 사라진 것 같다.

여여한 하늘, 마음을 치유한 것은 무엇인가
기억은 추억이 아니다. 아픈 기억을 숨기고, 멍한 채 이곳 강원도 홍천으로 실려 올 때가 내 나이 241세, 1636년 광해군의 다음을 이어받은 인조의 시대였다. 그 후 나는 오늘까지 387년 동안 수타사 대적광전 앞마당을 바라보며 근정전의 기억을 잊고 이 절 마당을 찾아오는 수많은 이들의 온갖 아름다운 말과 마음을 보았다. 그러다 보니 628세가 되었다. 하늘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여한데, 이제야 아름답게 청색으로 반짝이는 나의 몸을 처음 본다. 아름답구나, 미안하구나, 감사하구나.

글|정진희
방송작가, KBS <다큐온>, <다큐공감>, <체인지업 도시탈출>, EBS <요리비전>, <하나뿐인 지구>, <희망풍경>, MBC <다큐프라임>, JTBC <다큐플러스> 등에서 일했고, 책 『대한민국 동네 빵집의 비밀』을 출간했다.

사진|마인드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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