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람되고 부끄러운 불교 ‘밀당’ 이야기|나의 불교 이야기

외람되고 부끄러운
불교 ‘밀당’ 이야기

이동채 KBS 해설위원


자연의 끝과 학문의 정점이 합치된 곳이 바로 절(寺)
절(寺)은 흙(土)이 마디진 곳(寸)일까? 흙이 끝나는 곳에 사찰이 많기는 하다. 흙(土)이 아닌 선비(士)로 보면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학문을 하는 사람(士)의 끝(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학문의 정점에 있는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절이라는 해석이다. 어느 글에는 ‘그치다’는 뜻과 ‘발’의 뜻을 함께 가진 지(止)와 ‘용서’와 ‘계속’의 뜻을 가진 우(又)의 결합이라는 해설도 있었다. 높은 사람을 섬기는 곳으로 볼 수도 있고, 끊임없이 불공을 올렸다가 그치고, 또 올리는 곳으로 해석하고 싶기도 하다. 그런 절은 옛날부터도 아래에서 보면 산세가 멋지고, 위에서 보면 전망이 좋은 언덕 위에 자리 잡았음이 분명하다. 언덕을 뜻하는 峙(치)는 묘하게도 山과 寺가 더해져 만들어진 걸 보면 더 그렇다. 자연의 끝과 학문의 정점이 합치된 곳이 바로 절(寺)인 것이다.

절은 아낌없이 주기만 하는 무지 어진 곳
한자를 쪼개 풀이하는 파자(破子)로 봐도 대단한 절이지만 나에게 절은 그냥 쉬러 가는 곳이었다. 편한 곳이고, 공기 좋은 곳이며, 예술미마저 넘쳐서, 다녀오면 발걸음은 물론이고 마음가짐까지 가벼워지는 곳. 그래서 여유 있을 때 무작정 찾아가는 고향 친구 집 같은 곳이었다.

삼배를 드릴 때는 예의상 그냥 했고, 백팔 배 올릴 때 역시 운동하는 기분이었을 뿐이지 간절함은 없었다. 아마도 많은 ‘반(半) 불자’들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절에서 스님을 뵙고, 부처님 뵙는 것은 친구들과 막걸리 한잔하며 옛얘기 나누는 것만큼 편하고 즐거운 일인 건 분명하다. 절은 우리에게 달라는 것 하나 없지만, 아낌없이 주기만 하는 무지 어진 곳이었다.

나의 불교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진 속의 아름다움과 평화 그것뿐이었다
내가 찍은 사진 중에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진이다. 배경은 대비사. 젊은 스님이 잘 키운 삽살개 한 마리와 내 자식들이 주인공이다. 삽살개와 누나를 잡으러 뒤뚱뒤뚱 따라가는 놈이 대학생이 되었으니 18년 전 사진이다. 대비사는 청도 처가를 찾을 때면 장모를 모시고 종종 들르는 고찰이다. 신라 진흥왕 때 청도군 금천면 박곡마을에 지어졌다 하고, 고려 때 지금의 산속으로 옮겨 지었다니 부족하기만 한 인간의 고개를 저절로 숙이게 만드는 고찰이다. 고승 대덕의 부도가 많고, 대웅전은 보물이다. 저런 곳에서 어찌 평온이 오지 않을 수 있으랴. 그랬다. 나의 불교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진 속의 아름다움과 평화 그것뿐이었다.

선배의 출가는 불교와 절이 현실로 다가온 사건
그런 불교와 절이 현실로 다가온 사건은 평소 존경했던 선배의 출가였다. 고교 첫 달 까까머리 때 뵈어 44년이 흘렀는데 어느덧 속세보다 스님으로 모신 세월이 훨씬 길다. 공부는 수업 시간 때만 겨우 할 뿐이고, 수업 중에 몰래 만화를 보다가 선생님께 두들겨 맞았던 개구쟁이 선배. 그러면서도 늘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천재 선배. 가끔은 여학교에 놀러 가자고 했고, 교회에 가자고 유혹하기도 했던 엉뚱한 선배였다. 최고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면서 당구마저 수학적으로 잘 쳐서 엄청나게 고수였던 괴짜셨지만 늘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했던 전형적인 그 시절 대학생이었다. 그 ‘표준형 대학생’이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불교학생회에 자주 출입하실 때까지만 해도 ‘또 다른 엉뚱한 취미’ 생활을 찾으셨나 보다 생각했을 뿐이었다.

박사 과정까지 잘하던 어느 날 그가 “중이 되련다!” 선언하고 갑자기 사라졌다. 충격이었다. 학위 받고 세상에 나가서 크게 베풀고 힘쓰며 살아야지 무슨 놈의 중이 되어 아무 쓸모없는 염불을 외고 목탁만 치려고 하는 바보 같은 짓이냐고 나는 그를 욕했다. 젊은 지식 청년의 당시 ‘집단 가출과 무더기 출가’는 신문에 크게 났고, KB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도 방송되어 엄청난 세상의 주목을 받았지만 나는 늘 욕하고 다녔다. “참 나쁜 놈들이라고.”

그러고 몇 년 뒤 그가 나타났다. 그때 내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잘 어울리지 않는 가사를 걸쳤지만, 작은 깨달음을 얻은 배고픈 선비였다. 선했던 맑은 눈동자와 앳된 관상은 더 고결해졌다. 우리 집에서 하루 묵으시며, 공양도 같이하고, 출가 전후 배우고 느끼신 말씀도 많이 해주신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스님 아재’. 그때부터 우리 딸이 지어준 ‘스님 아재’가 되셨다. 시공을 초월해 어른이 되어 나타난 ‘스님 아재’가 너무 편했고, 깊이 감사했다. 참스승이 되어 다시 오셨구나 하고.

쉽게 쓰신 불교 관련 책을 선물 받기도 했고, 선원을 내신 뒤에는 시간 날 때마다 아이들과 아내와 같이 찾아가 예불을 드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와 가족에게 해주신 이런저런 말씀은 하루하루를 분초 단위로 살아가는 KBS 기자 생활의 피로를 잊게 해주면서도 가끔 느슨하게 놓고 살았던 나의 ‘정신 줄’을 다잡게 해줬다.

일주일에 한 번 꼭 절 찾으며 나는 불교와 ‘밀당’한다
그때부터 내친김에 부처님께 하나씩 빌어보기로 했다. 나라와 회사와 가족의 발전과 평화를. 그런데 부처님은 참 무심하기도 하시지, 하나 같이 다른 결과물을 주셨다. 대한민국은 계속 혼란 속에 머물러 있고, 자랑스러웠던 KBS는 여전히 갈등의 소굴인 채 자꾸 위상이 떨어지고 있다. 게다가 평화롭기 그지없던 집에는 엄청난 불행까지 닥쳤다. 과연 부처님이 내 기도를 듣기나 하는 건지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도 나는 일주일에 한 번 꼭 절을 찾는다. 대부분 아내와 같이 가고, 가끔은 아이도 같이. 근엄한 가장으로서 겉으로야 좋은 마음가짐으로 가지만, 사실 나는 절에서 욕설만 하고 내려올 때가 많다. 평소 어디서도 못 할 쌍욕을 마음속으로 실컷 하고 세상으로 다시 나온다. 부처님께도 욕하고, 주지 스님께도 하고, 멀리 내려다보이는 여의도 쪽에 침을 뱉기도 한다. “왜 제가 발원하는 것과 반대 결과들만 주십니까? 저는 이리도 열심히, 착하게 사는데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울부짖으면서 그렇게 마음으로 소리치면 그래도 얻는 것은 있다. 그것이 뭔지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잘 아실 것 같다.

부처님께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러면 부처님 앞에서 세상 걱정도 한 번 하고, 대웅전 앞에 앉아 멀리 도시를 내려다보며 ‘남들이 다 하는’ 나라 걱정도 다시 한 번 한다. 곧 떠날 KBS를 위해 불공 한 번 더 드리고,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얼굴까지 간절히 그려보고서야 절을 떠난다. 부처님 앞에서 그렇게 마음속의 널을 뛰고 나면 내 마음이 가벼워지는 건 부처님 때문일까? 그 절 때문일까? 아니면 그 절 속에 은은히 있는 신성한 불심 때문일까? 오늘도 나는 불교와 ‘밀당(밀고 당기기를 줄여 부르는 신세대 조어)’을 계속하고 있다.


이동채 |서울대학교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석사를 마쳤다. KBS 보도국 기자로 언론인으로서 출발해, LA 특파원, 사회부장, 국제주간, 대구방송총국장 역임하고 현재는 KBS 해설위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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