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에서 보는 무아

우리 존재는 무상이고 고(苦)이고 무아

전현수
전현수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정신과 의사이자 초기 불교 수행자로서 무아가 사실이고 진리라고 생각해
불교계에서 무아와 참나라는 말이 있고 그에 대한 견해의 차이 그리고 논쟁도 있다고 안다. 참 민감한 주제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정신과 의사이면서 초기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한 입장에서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먼저 나는 무아와 참나를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말하는 무아와 참나의 정의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굉장한 혼란이 있을 수 있고 같은 내용을 다른 용어로 쓸 수 있다.

나는 참나는 모른다. 초기 불교에서는 무아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쓰는 무아는 초기 불교에 입각해서 쓴다. 초기 불교의 무아는 두 가지 뜻에서 쓴다. 하나는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는 눈곱만큼도 없다는 뜻에서 무아라는 말을 쓴다. 이런 무아가 사실이고 진리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참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참나 정의가 참 궁금하다.

몸과 마음은 인과의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며,
불교의 인과 법칙은 숙명론과 달라
내가 치료하는 정신과 환자는 마음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자기는 자기를 괴롭히는 생각을 안 하고 싶은데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또 좋은 의지를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알코올 중독자는 다시는 술을 마시지 말아야지 하고 백 번, 천 번 결심을 해도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된다. 암에 걸린 환자들도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사실 그렇다. 우리를 이루는 몸과 마음은 잘 관찰해보면 인과의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 우리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건강할 때는 마치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몸과 마음이 움직인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은 그때도 몸과 마음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인과의 법칙에 따라 돌아간다. 그렇다고 고정된 인과의 법칙이 아니라 순간순간 인과의 법칙에 의해 돌아간다. 어떤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은 그 순간의 조건에 따라 일어나지만 일어난 것에 대한 반응에 따라 다음이 결정된다. 그래서 불교의 인과의 법칙은 숙명론과 다르다.

정신과 환자나 다른 질병을 가진 환자,
정신의학과 신경과학 연구하는 사람들도 무아 쪽
정신과 환자나 다른 질병을 가진 환자뿐만 아니라 정신의학과 신경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견해도 무아 쪽이다. 신경과학자인 샘 해리스는 『자유의지는 없다』라는 책에서 인용한 실험에서 실험자들이 사람을 실험실에 넣고 어떤 행동을 하게 하고 그것을 기능자기공명영상(FMRI)으로 촬영했다. 실험을 관장하는 과학자는 실험실 안에 있는 사람이 앞으로 무슨 행동을 할지 먼저 알았다. 피실험자는 알지 못할 때 그 사람보다 먼저 그 사람이 할 행동을 알았다. 그 사람의 뇌에서 앞으로 할 행동의 신호가 그 사람은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일어나기 때문이다. 샘 해리스는 사람들이 뇌에서 일어나는 신호를 포함해서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면 자유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자유의지가 있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정보가 실제로 있는 것처럼 느끼고 빈번히 사용되니 그것을 나라고 생각
뇌과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 정신과 의사 이병철 선생도 학술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표하면서 우리 존재는 무아라고 말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생존이 가장 중요하다. 잘 생존하기 위해 앞으로 닥칠 위험을 예측하면서 인지 기능이 생겼다.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하는 것은 생존에 유리하냐 불리하냐와 일치한다. 생존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된다. 잘 생존하기 위해서는 나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과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잘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바람이 느껴질 때 바람이 불어와서 바람을 느끼는 것인지 내가 달려가서 바람 현상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때 외부의 것이 내 생존에 더 중요하다. 살아가면서 나로 인해 생기거나 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취합해 나로 생각하고 밖에 있는 것은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모두가 다 정보일 뿐이다. 그 정보가 실제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것들이 빈번하게 사용되니 그것을 나라고 생각한다.

행동이 필요한 것은 감정을 만들어서 하는데
감정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생긴 것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해서 가장 합리적인 행동을 할 뿐이다.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예측할 때의 과정은 우리의 통제가 작용하지 않고 그냥 진행될 뿐이다. 그것이 일어나는 과정은 샘 해리스가 인용한 실험처럼 우리가 의식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고 오로지 진행만 된다. 이 과정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는 명백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경우는 감정을 만들어 행동하게 한다. 행동이 필요한 것은 감정을 만들어서 한다. 우리가 중요시하는 감정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생긴 것이다. 우리 속에서 이런 것들이 일어나고 있을 때 우리가 의지적으로 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렇게 무아인 것은 발전된 신경과학과 뇌과학의 실험으로 밝혀지고 과학적인 진리가 되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 과학의 발전과 함께 더 분명한 사실이 될 것이다.

우리 존재는 무상이고 고(苦)이고 무아
내가 초기 불교에 입각한 수행을 해 삼매를 닦고 삼매를 얻었을 때 생기는 지혜의 눈을 통해 궁극적 물질과 정신을 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연기 수행과 궁극적 물질과 정신의 속성인 무상, 고, 무아를 보는 위빠사나 수행을 했을 때 우리 존재를 이루는 궁극적 물질과 정신은 조건에 따라 아주 빠르게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너무 빠르게 일어났다 사라지기 때문에 아주 잠깐이라도 고정된 실체로 존재할 수 없고 그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통제할 수 없고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무상이고 고(苦)이고 무아다. 연기 수행을 통해 인과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면 지금의 몸과 마음의 어떤 현상이라도 그것이 있을 수밖에 없는 현재의 원인과 과거 생의 원인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 지금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내 속의 현상이든 외부의 현상이든 필연적인 이유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지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 그 현상을 통해 나 자신과 남과 세상을 정확하게 아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그때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나 남을 비난하거나 후회하거나 남과 비교하면서 자신에게 손해인 행동을 한다. 인터넷에서 ‘진정한 용서는 그 일을 경험하게 해주어 고맙다는 것이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정확하게 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일어날 만한 이유가 있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 일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배운다. 이렇게 인과의 법칙을 확실히 알게 되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속에 모든 것이 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다 보면 앞으로 내가 무엇이 될지 모른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아마도 내가 될 수 있는 최선의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칫하면 힘들 수 있는 세상에서 정확히 알고 그에 맞게 살아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전현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학 박사, 현재 전현수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한국불교심리치료학회 운영위원으로 있다. 저서에 『정신과 의사의 체험으로 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전현수 박사의 불교정신치료 강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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