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닌 신화적 힘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 정여울 작가의 책 읽기 세상 읽기

우리 안의 신화를 실현하는 길
『신화와 정신분석』

이창재 지음, 아를 刊, 2023 

신화 속의 영웅과 현대 사회의 영웅의 차이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이루어낼 자기만의 신화가 있다. 그런 자기만의 신화를 융 심리학에서는 ‘원형(archetype)’이라고 부른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일지라도 자신도 모르게 위대한 과업을 차곡차곡 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외적으로는 매우 불리한 상황인데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사람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영웅’이다. 현대 사회에서 영웅은 심각하게 세속화되어 있다. 예컨대 액션 히어로물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부자이고, 육체적으로 강력하며, 평범한 사람들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대단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신화 속의 영웅은 돈이나 권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신화 속의 영웅을 특징짓는 것은 오히려 고통받는 존재를 향한 한없는 자비심이다. 바리데기처럼, 자신을 버린 아버지의 생명을 구하는 미션이 끝난 뒤에도 세속의 부귀영화를 선택하지 않고 ‘죽은 자와 산 자를 이어주는 만신의 몸주’가 되겠다는 선택을 하는 것. 타인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함께 아파하는 존재야말로 신화 속의 영웅이다.

칼 융이 말하는 ‘개성화’의 서사의 주인공들
이렇듯 자기 안의 원형적인 신화를 진정으로 살아내는 존재야말로 영웅이며, 그 영웅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것이 신화학이나 심리학의 과업이기도 하다.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자기 안의 신화적 힘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헤라클레스나 제우스처럼 강력한 영웅이 아닐지라도 바리데기나 프시케처럼 ‘버려진 존재’에서 시작해 마침내 ‘신들마저 감동시키는 구원과 초월의 존재’로 거듭나는 이야기야말로 칼 융이 말하는 ‘개성화’의 서사다.

우리가 지닌 신화적 힘, 또는 무의식의 힘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신화와 정신분석』은 동서고금의 다채로운 신화들과 프로이트와 융을 비롯한 다양한 정신분석 및 심리학의 이론들을 접목해 ‘인간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무의식의 본질’에 접근한다. 이 책 속에서 우리는 신화 속에서 배우는 것이 단지 영웅들의 찬란한 모험담이나 힘의 과시가 아니라 ‘우리가 지닌 신화적 힘, 또는 무의식의 힘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일상적이고 실천적인 문제임을 깨달을 수 있다. 바리데기가 자신의 능력을 오직 아버지 오구대왕을 구하는 데만 썼다면 그녀는 결코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를 연결하는 ‘만신의 몸주’라는 샤먼의 길로 접어들 수 없었을 것이다. 여리고 연약한 존재였지만 마침내 타인의 아픔을 치유하는 존재가 되는 삶의 주인공들이야말로 진정한 개성화의 화신들이 아닐까.

영화 <패터슨(Paterson)>을 보면 시종일관 너무 철없고 순진하게만 보이는 아내 로라가 등장한다. 로라는 남편 패터슨에게 자꾸만 ‘당신의 시를 세상에 발표하라’고 부추긴다. 버스 운전사인 남편 패터슨은 컴퓨터로 작업하지 않고 오직 종이로 된 공책에만 시를 쓰면서, 좀처럼 자신의 시를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남편의 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아는 사람은 아내뿐이다. “왜 그 좋은 시를 당신 비밀 노트에만 숨겨두는 거야.” “이제 당신의 시를 세상에 발표할 때가 되었잖아.” 내가 보기에 패터슨은, 그리고 우리 주변의 수많은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사람들은, ‘자기 안의 신화’를 마음 깊은 곳에 숨기고 있는 눈부신 은둔자들이다. 이렇게 자신의 신화를 바깥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언젠가 절체절명의 위기가 온다. 어느 날 불도그가 패터슨의 ‘하나뿐인 공책’을 물어뜯어 산산이 조각내버린 것이다. 이제 패터슨의 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위대한 시인의 싹을 지닌 패터슨의 꿈은 이제 허망하게 끝난 것일까. 때로 지혜로운 멘토는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마치 벼락을 맞아 집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 같은 상황이 되어버린 패터슨에게, 일본 시인은 새로운 노트를 선물하며 이렇게 말한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텅 빈 노트에 무엇을 써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하는 순간, 패터슨은 다시 한번 시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자기 안의 신화를 실현할 기회를 되찾은 것이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비로소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기도 한다. 패터슨은 용기를 내어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이렇듯 우리가 진정으로 꿈꾸던 일을 바로 오늘부터 시작하는 것, 그 작은 시작의 발걸음을 소중히 여기며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삶을 사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 안의 신화’를 실현하는 길이다.

정여울
KBS라디오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살롱드뮤즈> 연재.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 진행자.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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