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는 오온이 '나'일 수 없음을 일깨운다

특집 | 무아와 참나

초기 불교의 무아 교리

임승택
경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윤회를 벗어나도록 이끄는 가르침
무아(無我)의 교리는 ‘자아’에 관한 거짓된 관념에 붙들리지 말라는 메시지이다. 거짓된 자아 관념이란 흔히 오온(五蘊)으로 일컬어지는 경험적 요인들과의 동일시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몸(色)이나 느낌(受), 지각(想), 지음(行), 의식(識) 따위에 매몰되어 이들을 ‘나’ 자신으로 착각한다. 그렇게 해서 몸을 곧 ‘나’라고 생각하면서 우쭐거리거나 우울에 빠진다. 유쾌하거나 불쾌한 느낌에 맞닥뜨리게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각이나 지음 혹은 의식 따위도 강력한 집착과 아집을 일으켜 괴로움(苦)의 원인이 된다. 대다수 범부는 이들과의 동일시를 통해 빚어진 ‘나’라는 환상에 갇힌 채 살아간다.

무아의 교리는 이러한 착각과 환상을 깨뜨려, 오온 따위가 ‘나’일 수 없음을 일깨운다. 사실 초기 불교 경전에서 무아에 대한 설명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중 가장 많이 반복되는 설명 방식이 ‘동일시의 부정(disidentification)’이다. 즉 오온 하나하나에 대해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그러한 ‘나’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언급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무아의 실제 내용으로 풀이하셨고(SN. III. 22 등), 다른 어떠한 교설보다도 반복적으로 강조하셨다. 이러한 ‘동일시의 부정’은 비단 오온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십이처(十二處)라든가 십팔계(十八界) 따위의 다른 분류법에도 적용된다. 이와 같은 방식의 무아 서술은 『니까야』 전체에 걸쳐 수천 건에 이르는 검색 횟수를 보인다.

부처님께서는 오온에 대해 무아로 보게 될 때 염리(厭離)와 이탐(離貪)에 이르게 되고 또한 해탈(解脫)로 나아간다고 가르치신다(SN. III. 21 등). 나아가 다시는 ‘이러한 상태로 향함’이 없게 된다고 덧붙이신다. 요컨대 오온이 ‘나’가 아님을 깨달음으로써 윤회가 없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신다. 바로 이것이 초기 불교의 경전에 나타나는 무아 교리의 전형이다. 오온 따위를 ‘나’와 동일시하지 않음으로써 그들로 인해 발생하는 탐욕과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무아란 윤회라는 괴로움의 사슬을 벗어나도록 이끄는 가르침이다. 여기에 어떤 오해라든가 혼동이 깃들 여지란 없다.

‘동일시 부정’의 무아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론적 반성에 해당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비아(非我)’의 의미에 가깝다. 다만 ‘나’가 아닌 것들에 대해 ‘나’로 착각하지 말라는 일깨움일 뿐이다. 이러한 의미의 ‘무아’ 혹은 ‘비아’란 자아에 대한 존재론적 부정이 아니다. 몸과 마음을 이루는 현상적 요인들에 현혹되지 말고, 그들 모두에 대해 ‘거리 두기’를 하라는 뜻이다. 그러한 ‘거리 두기’를 수행해나가는 주체로서의 ‘나’ 혹은 ‘1인칭 화자’는 거부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무아의 실천은 ‘나’에게 속지 않는 각성된 의식을 필요로 한다. 이것을 간과할 때 무아의 교설은 실천적인 성격을 잃고 만다. 그렇게 해서 ‘무아’를 객관화하고 절대화하는 견해들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윤회의 교리와 결부된 새로운 무아 해석
유감스럽게도 후대에 이르면서 무아의 교리에 각종 형이상학적 사색들이 개입되기 시작한다. 부처님께서 무아를 설하신 본래의 취지는 잊히고, 무아를 절대화하는 경향들이 부각된다. 첫째로, 상호의존(相互依存)이라는 관계성에 입각해 무아를 해석하는 경우를 꼽을 수 있다. 둘째로, 업보(業報)는 있지만 짓는 이(作者)는 없다는 방식으로 연기(緣起)와 무아를 연결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마차의 비유로써 ‘부품’만이 실재하고 마차라는 ‘전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방식으로 자아의 부재를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구사론』 등 후대 부파불교에 이르러 부각된 새로운 무아 해석을 대변하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많은 이들이 따르고 있다.

상호의존성에 입각해 무아를 해석하는 경우는 우리 존재가 타자에 의존하는 상대적인 것이고, 고정불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구사론』에 따르면 몸과 마음은 각자 자신의 인연에 근거해 일어나며, 그러한 인연 또한 각기 자신의 인연에 의지해 일어난다. 따라서 스스로의 힘만으로 일어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외도에서 주장하는 ‘실체적 자아’란 인정되지 않는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인연에 의한 생멸 변화 자체가 무아를 이룬다. 무아란 상호의존성 혹은 인과적 의존성과 동일한 의미가 되며, 현상계의 운행 과정이 곧 무아를 실현한 상태가 된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란 인정되지 않지만 생사의 윤회는 지속된다.

두 번째 새로운 해석은 “눈의 기능(眼)은 생겨날 때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 가는 곳이 없다. (…) 업보는 있지만 ‘짓는 이(作者)’는 없다. (…) 단 세속의 수법은 제외된다(除俗數法)”(T99. 92c)라는 『아함경』의 『제일의공경』에 근거한다. 여기에서 ‘짓는 이’가 ‘없다’는 표현은 곧 무아를 의미한다.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 가는 곳이 없다”라는 언급은 그러한 무아의 경지를 묘사한다. 그런데 이 구절은 연기 혹은 윤회를 벗어난 무위의 세계를 노래한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경지에서는 업보만이 존재할 뿐 ‘짓는 이’는 없다는 의미이다. 한편 후미의 ‘세속의 수법’은 이 경전의 뒷부분에서 십이연기(十二緣起)로 풀이된다. 십이연기의 흐름 안에서는 ‘짓는 이’의 ‘없음’이 ‘제외된다’는 것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짓는 이’가 ‘없다’는 표현만을 강조하면서 연기적 과정, 즉 ‘세속의 수법’까지를 무아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오독(誤讀)은 문장 전체를 보지 못한 탓이다.

마지막으로 무아에 대한 후대의 해석에서 자주 인용되는 또 하나의 경구가 있다. “마치 부품들을 조립한 것이 있을 때 ‘마차’라는 명칭이 있는 것처럼 제온(諸蘊)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인습적 표현이 있을 뿐이다”(SN. I. 135)라는 와지라(Vajira) 비구니의 언급이다. 실재하는 것은 오직 오온이라는 경험적 요소들이며 중생이니 자아이니 하는 것들은 ‘인습적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급은 ‘부분’을 떠난 ‘전체’를 별개의 것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경험적 사실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마차와 부품의 쓰임이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으며, 오온 또한 ‘인습적 표현’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무한 퇴행에 빠지게 된다. 이 경구는 주요 『니까야』에 단 한 차례만 등장할 뿐이며,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것도 아니다.

이상의 세 가지 새로운 무아 해석은 나름의 설득력을 지닌다. 그렇지만 부처님께서 설하신 ‘동일시의 부정’이라는 무아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들의 무아 해석은 자아의 ‘부재’를 존재론적인 방식으로 객관화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무아의 경지를 연기 혹은 윤회의 상태와 무차별적으로 동일시한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연기하고 윤회하는 자체를 무아의 양상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연기 혹은 윤회의 세계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무아의 상태와 다를 바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가 윤회 혹은 연기적 유전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가 없어지는 셈이 아니겠는가.

끝으로 무아의 교리와 관련해 짚고 넘어가야 할 또 다른 부류의 경전들이 있다. “‘내가 있다(Asmīti)’라고 생각하는 것도 망상에 빠진 것이고(papañcitam) ‘내가 있지 않을 것이다(na bhavissan ti)’라고 생각하는 것도 망상에 빠진 것이다”(SN. IV. 203)라는 아시비사왁가(Āsīvisavagga)의 경구이다. ‘자아’라는 ‘견해(diṭṭhi)’는 물론이거니와 ‘무아’라는 ‘견해’마저도 ‘족쇄에 묶인 상태(saṃyojanasaṃyutto)’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하는 『뿌리에 대한 법문 경』의 가르침도 그러하다(MN. I. 8). 이들 경전은 ‘자아’든, ‘무아’든, ‘있음’이든, ‘없음’이든, 어떠한 유형의 견해일지라도 그러한 견해 자체가 망상에 불과한 것이고 집착과 아집일 수 있음을 환기한다. 무아에 대해 날을 세우는 바로 그것이 무아에 반하는 행위일 수 있음을 경고한다는 점에서 새겨둘 필요가 있다.

임승택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교학연구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경북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얀마의 위빠사나센터에서 수차례 안거 수행을 마쳤다. 『고전요가의 이해와 실천』, 『위빠사나 수행관 연구』 등 다수의 역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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