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나요?
정준영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행복해지는 방법은 간단하다. 가장 빨리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은 감각적인 즐거움을 주고, 좋아하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는 안정감을 준다. 그러니 몸과 마음이 모두 행복해진다. 간단하다. 하지만 이러한 행복에 머지않아 문제가 생긴다. 맛있는 음식이 계속 맛있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도 계속 좋지만은 않다. 음식도, 입맛도, 좋아하는 사람도, 환경도 모두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행복을 경험할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결핍을 경험하고, 결핍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을 일으킨다. 일으킨 욕망이 충족되면 쾌감, 만족감이 일어나며, 이것을 행복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배가 고파 맛있는 짜장면을 먹고 싶어 맛있는 중식당에 가서 짜장면을 입에 넣는 순간, 그 욕망이 해결되면서 즐겁고 행복해진다. 감각적으로 맛을 즐기고 행복감을 느낀다.
그리고 추가로 짜장면을 먹으면서 더 행복해지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은 못 먹고 나만 먹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경쟁자 혹은 싫어하는 사람 정도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혹은 과거와의 비교를 통해 지금을 평가하고 행복감을 느낀다. 이것은 맛을 느끼는 감각적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인지적 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감각적 욕망이 충족되고, 인지적으로 다른 사람이나 과거와 비교해서 나아져도, 머지않아 그 상황에 적응하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
예를 들어 짜장면을 맛있게 먹었고 이제 배도 부른데, 아이들이 남긴 짜장면이 아까워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괴로움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즉 행복은 곧 적응하게 되고, 머지않아 또 다른 욕망과 결핍이 나타난다. 이러한 반복적인 순환이 지속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평정심이다
그래서 불교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행복을 찾는다.
즐거움은 괴로움을 조건으로 하고, 괴로움은 즐거움을 조건으로 한다. 마치 파도의 파고처럼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고, 밀물과 썰물처럼 오고 감을 반복한다.
물론 불교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 역시 행복이다. 팔리어로는 ‘수카(Sukha)’라고 부른다. 하지만 여기서 행복은 즐거운 감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의 끊임없는 반복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머지않아 행복에 적응하고 다시 결핍이 생긴다. 하지만 이 적응과 결핍 사이, 평정을 경험할 수 있다.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상태이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행복은 바로 이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바로 평정심이다.
물론 초기 불교의 행복(Sukha)은 감각, 정서, 의도적 현상뿐만 아니라, 선정(禪定), 범부(凡夫), 유학(有學), 무학(無學), 해탈(解脫), 열반(涅槃)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수행자가 선정(禪定)에 들어 행복을 경험하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맛지마니까야(M.59)』의 「바후웨다니야 숫따(많은 느낌의 경)」에서 붓다는 만약 어떤 사람이 감각적 즐거움과 행복을 가지고 중생이 경험하는 최상의 즐거움이라 말한다면 동의할 수 없다고 설하신다. 왜냐하면 훨씬 아름답고 뛰어난 행복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첫 번째 선정이라고 하신다. 첫 번째 선정은 집중을 통해 장애들에서 벗어나 얻는 고요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붓다는 첫 번째 선정보다는 두 번째 선정이 훨씬 더 훌륭하고 탁월한 행복이라고 설하신다. 그리고 더 나아가 두 번째 선정보다는 세 번째 선정이 훨씬 더 행복하고, 세 번째 선정보다는 네 번째 선정이, 네 번째 선정보다는 다섯 번째인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이, 공무변처정보다는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이, 식무변처정보다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이, 무소유처정보다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 비상비비상처정보다는 상수멸정(想受滅定)이 더 행복하다고 설법하신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행복을 연습하라
붓다는 선정의 점진적인 성장과 더불어 행복의 성장이 비례함을 설명하신다. 하지만 여기서 행복은 감각적 즐거움이 아니다. 이미 희열(喜悅)은 세 번째 선정에서 소멸했고, 몸의 즐거운 감각과 정서는 네 번째 선정을 통해 소멸했다. 심지어 상수멸정에서는 의식마저도 중지한다. 하지만 붓다는 이들을 모두 최상의 행복이라고 표현하신다.
여기서 행복은 감각을 초월한 수승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교의 행복은 감각적 즐거움을 초월한다. 만약에 우리가 행복해지고 싶다면 행복해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우리는 대상에 향한 집중을 통해, 주변의 자극에 동요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유지할 수 있다. 이처럼 붓다가 제안하는 집중은 자극에서 벗어나, 평정을 유지해준다. 명상은 스스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이며 행복을 위한 길이다.
불교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을 이야기한다. 내 삶의 주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과도한 타인의 의식은 행복감을 낮춘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연습을 해야 한다. 연습의 빈도가 늘어나면 행복의 빈도도 늘어날 것이다.
정준영
스리랑카 국립 켈라니아대학교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주제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명상학 전공 교수로 있으면서 대원아카데미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 다른 명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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