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소비는 무분별의 살생이다 |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자

과소비는
살생이다!

성태용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환경문제 해결의 근본 처방은 종교적 실천
인류의 존망을 결정지을 가장 중요한 문제가 환경오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환경 파괴를 조금씩 줄여보자는 식의, 우리의 욕망은 충족시키되 가능하면 절제하자는 식의 운동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좀 심한 표현일 수 있지만, 속된 말로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의 대처라고 할까?

이런 행태를 벗어나는 근본 처방이 없이는 환경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 그리고 그에 대한 유일한 답은 종교가 아닐까 싶다. 이해득실을 따지는 방식이 아니라,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안 된다!”면서 참된 삶의 길을 가르쳐주는 종교적 실천만이 인류를 살리는 길이다. 나라 사이의 경쟁도 넘어서서 세계를 아우르는 커다란 흐름이 일어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을 일으킬 수 있는 근본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불교일 것이다.

생명에 대한 사랑이 환경문제 해결의 길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 ‘자비와 지혜의 종교’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비란 무엇인가? ‘생명에 대한 사랑’이라고 표현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 불자들 삶의 준칙이라 할 수 있는 계율을 꿰뚫는 근본정신은 바로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근본 계율이라 할 수 있는 오계를 보자. “산목숨 죽이지 말라”는 것이 근본이다. 그대로 생명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신이 그대로 나머지 계율에도 이어진다.

우리가 과소비를 한다는 것은 바로 다른 생명의 몫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의 수십 배를 소비한다? 한정된 자연의 자원 속에서 그것은 다른 생명이 누려야 할 몫을 도둑질하는 짓일 수밖에 없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와 곧바로 이어진다. 자기 몫을 빼앗긴 생명은 어찌 되는가? 생존 경쟁의 엄혹함을 여기서 다시 말할 필요가 있을까? 자기 몫을 빼앗긴 생명은 죽어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과소비는 ‘도둑질’에 그치지 않고 결국 산목숨을 끊는 살생이 된다. 내 생명도 생명이니, 내 생명 살리는 정도야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아니 그냥 넘는 정도가 아니라 몇 십 배를 소모하는 과소비는 무차별, 무분별의 살생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당장 암세포 같은 삶을 중단해야 온 생명이 산다
그렇게 사는 우리 삶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암세포’의 삶이다. 끊임없이 자기를 불려 주변 조직을 모두 파괴하고, 결국 자기도 죽여버리는 암세포와 다를 것이 없다. 그 결말은 결국 자기도 죽는 것이다. 주변을 모두 파괴하고 죽여가면서 자신만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부처님의 연기법이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대승불교 연기의 궁극적 관점인 인드라망 연기를 보라! 저것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저것이 있다. 그리고 모든 존재 속에 온 누리가 있다. 어느 존재도 어느 생명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그리고 저것의 삶 속에 나의 삶이 있고, 저것의 죽음 속에 나의 죽음이 있다. 저것이 살아야 내가 살고, 저것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이런 암세포와 같은 삶의 모습을 끝내려는 굳센 마음 다짐을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얄팍한 계산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음, 그것을 따라 참 생명을 이루어나가려는 서원이 올바로 설 때 그러한 걸음을 시작할 수 있다.

참 생명의 바른 이상을 제시하고 그것을 향해 나설 수 있는 종교는 바로 불교
쉽지 않은 길이다. 아니, 매우 어려운 길이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우선 혼자 해서는 좀처럼 이룰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같은 믿음을 지닌 이들이 함께해나갈 필요가 있다. 여기에 종교의 역할이 있다. 모든 불자들이 같은 믿음과 서원 아래 함께 나가는 힘 있는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더 나가서는 한 종교만으로 될 일도 아니다. 이웃 종교와 대화하고 소통해 그들의 종교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가르침을 찾아내고, 함께하는 움직임을 일으켜야 한다. 그래야만 전 지구적인 움직임이 가능해진다. 참 생명의 바른 이상을 제시하고 그것을 향해 나가는 큰 흐름을 일으키는 데는 종교적인 움직임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에 가장 먼저 나서야 하고, 나설 수 있는 종교가 바로 불교다.

앞에서 어렵다 했지만 달리 생각하면 가깝고도 쉬운 길이다. 기본 계율인 5계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바로 “과소비는 살생이다”라는 앎에 이른다. 거기에서 구체적인 삶의 준칙을 발견할 수 있다. 그에 따르는 것, 그 간단한 실천이 우리 삶을 바꾸고, 나아가 온 세상을 바꾸는 첫걸음이다.

성태용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건국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월간 『불교문화』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한국철학회 회장, 학술진흥재단 인문학단장, 우리는선우 대표를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주역과 21세기』, 『어른의 서유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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