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기의
심리적 성숙과 명상
권석만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인생의 변화 과정을 흔히 사계절에 비유한다. 파릇파릇한 봄의 아동기와 싱싱한 여름의 청년기를 지나 가을의 중년기에 들어서면 여기저기에서 노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생의 겨울 노년기로 접어들면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과정’이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외로움에 떨지 않으려면, 인생의 월동준비를 충실하게 잘하는 것이 필요하다.
장수(長壽), 즉 오래 사는 것은 모든 사람의 소망이자 행복한 인생의 중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오래 사는 것이 반드시 축복인 것만은 아니다. 월동준비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재앙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품위있게 잘 늙고 잘 죽는 것이다.
노화 불안과 방어적 전략
인생의 가을인 중년기에 접어들면 세월의 빠름을 새삼 의식하게 되고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심리적 현상을 노화 불안(aging anxiety)이라고 한다. 연구자에 따르면, 노화 불안은 네 가지의 구성 요소, 즉 노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 자신의 외모가 늙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노년기에 불행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삶의 중요한 것들을 상실할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루어진다.
노화 불안은 늙어감에 대한 심리적 반응으로 개인마다 그 정도가 다르다. 노화 불안은 중·노년기의 여러 가지 선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삶의 질을 저하시킬 수 있지만, 성공적인 노년기를 준비하기 위한 자극제가 될 수도 있다. 노화 불안의 기저에는 죽음 불안이 존재한다.
인간은 노화 불안과 죽음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어 전략을 사용한다. 첫째는 ‘아직은 아니야’ 전략으로써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 ‘인간 수명은 150세까지 가능해’, ’죽음은 저 멀리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난 아니야’ 전략으로써 자신은 특별한 예외적 존재라서 늙음과 죽음의 운명이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셋째는 ‘신이 나를 구원해줄 거야’라고 믿는 것이며, 넷째는 늙음과 죽음에 관한 생각과 대화를 회피하며 다른 관심사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건강과 장수에 대한 과도한 관심, 자녀와의 심리적 융합, 집단과 이념에 대한 동일시, 돈과 성취에 대한 집착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노화 불안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방어 전략이 존재하지만 개인마다 독특한 전략을 채택할 수 있다.
노년기에 행복도가 증가하는 이유
대부분의 사람들은 늙음을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며 나이가 많아질수록 행복도가 낮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 나라에서 시행된 연구 결과들을 종합하면, 나이와 행복의 관계 그래프는 U자 곡선을 나타낸다. 즉 치열한 직장 생활과 자녀 교육에 매달리는 40~50대 중년기에 행복도가 바닥을 찍고, 그 이후부터 노년기에 들어서면서 행복도가 증가하는 패턴을 나타낸다.
몸과 마음이 늙어가는 노년기에 어떻게 행복도가 증가하는 것일까?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인 로라 카스텐슨(Laura Carstensen)은 그 이유를 시간 인식이 삶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회정서적 선택 이론(socio-emotional selectivity theory)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녀에 따르면, 우리가 누구를 만나 어떤 정서적 경험을 할 것인지 선택할 때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지를 중요하게 고려한다.
젊고 건강할 때는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며 자신의 기능과 능력을 잃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원대한 미래의 꿈을 꾸면서 사회적 관계를 확장하고 능력과 자원을 증대하는 일에 치열하게 매달린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들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선택의 기준이 급격하게 변한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늙어갈수록 높은 성취와 사회적 관계의 확장에 투자하는 시간을 줄인다. 관심의 범위를 좁히고 가족이나 오랜 친구들과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활동을 선택한다. 미래의 성취보다 현재의 삶을 풍요롭게 향유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삶의 초점을 ‘지금 여기’로 옮겨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일상의 기쁨을 함께하는 일에 집중하게 된다.
노년기의 심리적 성숙 : 노년 초월
모든 사람이 노년기에 행복도가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년기의 삶에 만족하며 행복도가 유난히 높은 노인들이 있다. 스웨덴의 사회학자인 라르스 토른스탐(Lars Tornstam)은 이처럼 삶의 만족도가 높은 노인들을 대상으로 심층 면접을 통해 그들의 심리적 특징을 조사해 ‘노년 초월(gerotranscendence)’이라고 지칭했다. 그에 따르면, 삶의 만족도가 높은 노인들은 자신과 인생에 대해서 새로운 초월적 관점을 발달시키는 심리적 성숙을 나타냈다. 노년 초월은 물질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에서 우주적이고 초월적인 세계관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삶의 만족도를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죽음 불안을 완화한다.
노년 초월은 세 가지의 심리적 변화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자기 존재와 늙어감의 실존적 상황을 우주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노년 초월을 경험하는 노인들은 자신이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자신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일부라는 느낌, 과거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그리고 자신이 과거와 미래의 연결 속에서 현재를 살고 있다는 느낌을 보고했다.
둘째, 현재의 자기와 과거의 자기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한다. 이기성과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자기 경계가 좀 더 유연해질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좀 더 너그러운 태도를 보인다. 자기중심성의 감소, 육체에 대한 집착 감소, 자신의 욕구에 초점을 맞추는 이기적인 삶에서 타인을 배려하고 후원하는 이타적인 삶으로 변화하면서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의 그림으로 통합해 인생의 전체성과 일관성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발달시킨다. 셋째, 노년 초월에서는 대인 관계를 비롯한 사회적 관계 전반에서 변화가 나타난다.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진실하고 깊이 있는 관계로 나아가고, 사회적 역할과 타인의 인정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태도를 지니게 된다. 과거에 자신을 억압했던 불필요한 관습, 규범, 규칙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표현하고 행동한다. 젊은 시절에는 옳고 그름 또는 선과 악에 대해 확신했지만 노년기가 되면 그러한 판단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옳고 그름의 이분법을 초월해 너그러움과 유연함이 증가하며 후속 세대의 행동에 대한 섣부른 판단과 충고를 하지 않는다.
토른스탐에 따르면, 모든 노인들이 노년 초월에 이르는 것은 아니며 약 20%의 노인들만이 노년 초월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많은 노인들이 우울과 불안의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가난, 질병, 고독의 결과이기보다 노년기의 성숙 과정이 지연되거나 차단된 결과일 수 있다.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중년기에 지녔던 가치, 흥미, 활동이 노년기에 그대로 이어지면서 노년 초월로 성숙하지 못한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노년기에 이르러 자신의 삶에서 고수했던 것들로부터의 자유와 초월을 경험하는 마지막 성장을 하게 된다. 인간의 발달과 성숙은 평생을 통해 이루어지며, 노년 초월은 노년기에 이루어지는 중요한 심리적 성숙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노년기의 관조적 자세와 명상 수행
불교는 인생의 전반부보다 후반부에 더 절실하게 마음에 와 닿는 종교인지 모른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봄과 여름은 지나가고 아름답던 단풍이 낙엽으로 변해 길바닥을 뒹구는 가을 풍경을 보면서 생로병사의 운명을 실감하게 된다. 몸은 시간이 흐르면 허물어지게 되어 있다. 사람에 따라 조금 빠름과 느림이 있을 뿐이다.
인생의 겨울이 다가오면 추위와 눈보라가 몰려올 것이다. 신체적 노화가 진행됨에 따라 질병을 앓게 되고 육체적 무기력과 통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와 함께 심리적 기능이 저하되고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에 자존감이 무너져 내릴 것이며 사회적 고립과 소외,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자기 존재의 무가치감과 인생에 대한 무의미감이 뼈저리게 찾아올 것이다. 건강이 악화되면 죽음 불안과 관련한 환각과 환상이 섬망의 형태로 나타나 공포와 혼돈 상태에 빠져들 수도 있다.
인생의 겨울을 편안하게 맞이하기 위한 최선의 월동준비는 관조(觀照)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 명상 수행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일상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뿐만 아니라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과정에서 직면하게 될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심리적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다. 인생의 겨울에 자욱한 안개처럼 다가오는 불안과 우울, 때로는 혹한과 폭설처럼 밀려드는 공포와 절망에 휩쓸리지 않고 맑게 깨어 그것을 공(空)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 노년기는 무상한 몸과 마음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담담히 미소 지을 수 있는 관조적 자세가 필요한 시기다. 티베트의 수행자처럼 의식의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에 휘몰아치는 공포와 유혹의 환상들을 맑게 깨어 바라볼 수 있으려면 명상 수행을 통해 관조의 힘을 길러두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의 물음 앞에서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다니야(Dhaniya)와 스승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폭우가 몰아치는 기나긴 우기(雨期)를 앞두고 소를 치는 사람 다니야가 말했다. “나는 밥도 이미 지었고 우유도 짜놓았다. 나는 큰 강변 언덕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내 움막은 지붕도 이었고, 불도 지펴놓았다. 하늘이여, 비를 내리려거든 내리소서.” 그의 말을 듣고 스승이 말했다. “나는 집착을 내려놓고 분노에서 해방되었다. 나는 큰 강변 언덕에서 하룻밤을 쉴 것이다. 내움막은 지붕도 드러나고, 욕망의 불도 꺼졌다. 하늘이여, 비를 내리려거든 내리소서.” 인생의 깊은 겨울이 다가왔을 때 “하늘이여, 폭설을 내리려거든 내리소서”라고 읊조릴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월동준비를 잘해두어야겠다.
권석만
서울대학교 심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호주 퀸즐랜드대학교에서 박사 학위(임상심리학 전공)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삶을 위한 죽음의 심리학: 죽음을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 『현대 심리치료와 상담 이론』, 『현대 이상심리학』, 『긍정심리학: 행복의 과학적 탐구』, 『인간 이해를 위한 성격심리학』, 『인간관계의 심리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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