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란 무엇인가 | B에게 보내는 여섯 편지


무위는 여래가 있든 없든 
존재하는 진리

정세근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친애하는 B에게 :

동양의 3대 사상인 유, 불, 도가의 ‘가운데 찾기’
잘 지냈소?
말한 것처럼 동양의 3대 사상인 유, 불, 도가가 모두 ‘가운데 찾기’를 말하고 있음을 잘 느끼길 바라오. 유가의 중용(中庸), 도가의 환중(環中), 불가의 중도(中道)가 바로 그것이오. 유가는 생활 속의 가운데 찾기를, 도가는 시비와 선악의 가운데 찾기를, 불가는 말로 할 수 있음과 말로 할 수 없음의 가운데 찾기를 꾀하고 있소.

유가는 삶에서 그 무엇이 모자라거나 지나치려 하지 않으려 한다오. 모자라면 얻으려 하고,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남기려 하지 않는다오. 사랑도 그래서 핏줄부터 챙기라고 말하지요. 그리고 그 사랑을 남에게로 넓히라는 것이오.

도가는 자기만이 옳다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았소. 이쪽에서는 이것이지만 저쪽에서는 저것이 될 수밖에 없는데도 말이오. 이쪽에서는 이것이 옳고 저쪽에서는 저것이 옳을 수밖에 없다오. 그래서 시비와 선악을 넘어서 그 가운데를 얻으라고 하는 것이오.

불가는 세상의 것이 없다고 하니 없다는 것에만 빠지고, 있다고 하니 있다는 것에만 빠지는 우리 인식의 한계를 드러낸다오. 인식의 한계는 곧 언어의 한계요. 그러니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말 없음에만 빠져서도 안 되고.

유가는 그 중용을 말하려고 ‘지나치면 모자란 것과 같다(과유불급過猶不及)’거나 ‘낮추기(겸손謙遜)’를 강조했소. 도가는 환중을 때로 ‘둘로 걸어가기(양행兩行)’라고 일컬으며 시비와 선악에서 하나를 택하기보다는 둘 다 잡고 걸어갈 것을 권유했소. 불가는 속세를 넘어 진리로도 가고, 진리를 넘어 속세로도 가려고 하기에 ‘현실이 진리이고, 진리가 현실이다(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라며 중론(中論)의 길을 간다오.

유가의 ‘때 잘 맞추기(시중時中)’, 도가의 ‘때에 편하기(안시安時)’, 불가의 ‘때를 흐르게 하기(무상無常; 무상시無常時)’는 모두 시간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얻어낸 윤리적 언명이오. 명령조로 말하면 유가는 ‘알맞은 때를 모르고 설치면 안 된다’는 것이고, 도가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때가 너의 때임을 받아들여라’는 것이고, 불가는 ‘때가 움직이지 않게 주어진 것이 아니니 때를 흐르도록 하라’는 것이오.

B여. 별것도 아닌 나의 글에 어떤 종교학자는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늘 튕겨 나오던 지난 기억과 함께 마음 한구석에 밝아오는 한 줌의 빛을 볼 수 있었다’고 편지를 보내주었다오. 왜 나라고 안 그렇겠소? 나도 늘 가고 싶은 곳이지만 맴돌다가 말았던 회한만이 떠오르오. 언젠가는 그 가운데로 깊게 뛰어들고 싶소. 시비를 넘어, 선악을 넘어, 미추를 넘어서 말이오. 바다 한가운데, 마음 한가운데, 빛 속 어둠이 아닌 어둠 속 빛 한가운데로 말이요. 그걸 심연(深淵), 심천(心泉), 유현(幽玄)이라고 문사들은 말했던 것 같소.

무위는 여래가 있든 없든 존재하는 연기와 같은 진리
오늘 나는 무위(無爲)를 말하고자 하오. 알다시피 본디 무위는 노자의 개념이라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된다(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는 주장이오. 여기에는 행위에 대한 발언만이 있는 것이 아니오. 그 안에는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강하게 깔리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오. 왜냐하면 ‘사람을 믿기에’라는 전제가 앞에 들어가 있어서 ‘내버려두면 잘될 거야’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오.

이렇게 무위는 사람에게 부여할 수 있는 온갖 긍정적 가치, 천부적 존엄, 희망적 기대를 담고 있소. 사람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그냥 버려둘 수 있겠소? 나아가, 어떤 사람도 그 나름대로 길이 있는데 이래라저래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노자의 개념을 불교가 적극적으로 빌려 쓴다는 사실이오. 불교에서 말하는 무위는 ‘무위법’과 ‘유위법’처럼 수준을 나눌 때 쓰오. 한마디로 무위는 유위보다 한 차원 높소. 아니, 한 단계가 아니라 최상을 가리킬 때 비로소 무위라는 말을 쓸 수 있다오.

불교에서 무위의 용법은 적지 않소. 특별하게는 호흡법을 말할 때도 무위라는 말을 쓰오. 이를테면 안세고의 『안반수의경』에서 아나(āna; 안; 들숨)와 파나(apāna; 반; 날숨)라는 호흡법을 말하면서 ‘뜻을 지키는 방법’으로 무위를 제시한다오. 수행의 단계를 설명하면서 무위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오. 한마디로 ‘안반수의는 뜻을 가다듬어 무위를 얻는 것(安般守意名爲御意至得無爲也)’을 이름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이야기해봅시다. 우리는 숨을 쉬며 사오. 그런데 우리는 숨을 느끼지 못하고 숨을 쉴 때가 많소. 기껏 숨을 느낄 때는 숨이 몹시 찰 때거나 하품할 때일 거요. 그런 점에서 숨이야말로 무위의 상태인 것 같은데, 그런 숨을 넘어서 제대로 된 숨을 쉬어보자는 생각을 할 수 있소. 그러니까 깊은숨, 안 가쁜 숨, 가지런한 숨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오. 우리도 그러지 않소? ‘숨 좀 가다듬어라’, ‘한숨 쉬어 가라’, ‘숨넘어가겠다’ 등등.

인도는 전통적으로 수행의 방법으로 ‘숨 고르기’를 해왔소. 요가 수행이 대표적이오. 그리고 그 요가(yoga; 유가瑜伽)가 유식종과 연결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오. 의식의 깊은 상태까지 이르려면 숨을 잘 골라야 하지 않겠소?

이런 무위(asaṃskṛta)와 유위(saṃskṛta)는 번뇌와 관련되어 무루(無漏; anāsrava)와 유루(有漏; āsrava)로 표현되기도 하오. 이는 빠짐이 없는 것과 뭔가 빠진 것을 가리키오. 그렇기에 부처님에게는 늘 무루라는 형용이 들어간다오. 여래무루인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진여무위’라든가, ‘증득무위’라든가 하는 말도 자주 쓰이오. 무위가 일체법의 진여성까지 격상되는 것이오.

여기서 문제가 나오오. 수행을 하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위라고 말하면 할 일이 없기 때문이오. 만일 수행을 부정하면 불교라고 할 것도 없어져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오. 그래서 초기 상좌부에서는 때로 무위법을 부정하기도 한다오.

그런데 무위는 여래가 있든 없든 존재하는 연기와 같은 진리를 상징하는 것이오. 싯다르타가 태어나서 생겨난 법이 아니라, 그가 깨달은 법을 가리킨다는 말이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배우고 몸과 마음으로 느끼려 하는 것이오.

무여열반(無餘涅槃; nirupadhiśeṣa-nirvāṇa)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요. 남는 것이 없는 열반을 중국인은 무위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소. 불교의 개념인 멸도(滅道)라는 개념을 쓰기도 했지만 말이오. 허무적막(虛無寂寞)의 세계를 무위로 불렀던 것이오.

여기서 철학적 문제가 나오오. 그건 최상의 것을 어떻게 얻거나 부를 것이냐는 문제요. 예술가가 무위해야 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오? 아닐 것이오. 가장 무위하면서도 온갖 표현을 잘하는 사람이 위대한 예술가일 것이오. 이런 현대적인 비유가 좋겠소.

피카소는 그림이랍시고 애들처럼 사방의 모습을 화폭에 옮겨놓았소. 잭슨 폴록이 화폭에 물감을 뿌려놓고 그림이랍시고 내놓았소. 뒤샹은 소변기를 가져다놓고 샘이라고 이름을 붙였소. 백남준은 텔레비전을 쌓아놓는 장난을 벌였소. 이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면서 무엇인가 한 사람들이오. 앤디 워홀은 더 웃기오. 그가 쌓아놓은 ‘캠벨 수프’나 ‘브릴로 박스’는 우리로 말하면 ‘동원참치 캔’이고 ‘삼양라면 박스’일 뿐이오. 만일 감상자가 캠벨이나 브릴로에 매달려 있다면 정말 예술의 ㅇ자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나는 확신하오.

그런 것이 무위의 예술이듯이, 불교도 무위를 통해 ‘있지만 없는’, ‘없지만 말해보는’, ‘다들 없어질 수밖에 없지만 이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종교임을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라오. B여!

정세근
국립대만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사)한국철학회 제53대 회장, 국가미래교육을 위한 전국철학회연석회의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노장철학과 현대사상』, 『윤회와 반윤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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