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넘어
학문과 심리학적 측면에
매료된 불교 공부
최일호
서강대학교 평생교육원 교수
한 권의 책으로 시작된 불교 공부
나의 불교 공부에 대한 인연은 스스로는 그 인연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겉보기에 아주 사소한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2007년쯤 어느 날 나는 우연히 『뇌』라는 소설을 재미있게 읽게 되었는데, 그 후 나도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맹랑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뇌』라는 소설은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체스를 소재로 쓴 작품으로 체스와는 무관한 삶을 살던 어떤 한 평범한 인물이 미스터리한 뇌의 조작 과정을 통해 세계 최강의 체스 챔피언이 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한 소설이다. 그 당시 나는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로 있었는데, 이 소설을 읽고 자극을 받아 바둑을 소재로 이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만용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 다가온 추석 연휴 동안 본격적으로 이야기의 구상에 들어가 연휴 3일 만에 대강의 줄거리를 완성했다. 불교는 이 과정에서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한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이야기의 제목은 반전무인(盤前無人, 이 말은 바둑판에 앞에 사람-상대-이 없다는 말로, 통상 바둑계에서 상대의 강함이나 약함을 의식하지 말고 자신의 바둑을 두라는 격언으로 사용된다.)으로 정했다. 구상한 이야기의 주제는 세상의 여러 전문 분야에서 과연 누가, 어떻게 당대의 고수가 되는가? 하는 질문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상대와 치열하게 경쟁을 해야 하는 다양한 승부의 세계에서 탁월한 고수가 되는 조건을 세 가지로 설정했다. 첫째 그 분야의 타고난 재능, 둘째 지속적으로 노력할 수 있는 동기의 힘, 셋째 큰 승부의 압박과 긴장에도 심리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마음 조절 능력 등이다.
창작 소설 속의 당대 고수들, 불교적으로 구원하기
나의 스토리는 세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들 중에서도 스토리의 핵심 주인공은 타고난 재능도 있고 꾸준히 노력하는 강한 동기의 힘도 갖추었지만, 큰 승부 앞에서는 동요와 불안이 심해 제대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마음 조절에 문제가 있는 인물이다. 이 인물은 어린 시절에는 뛰어난 기재로 차세대 유망주로 큰 기대를 받았지만 성장하면서 중요한 큰 대회만 나가면 과도한 긴장으로 실력이 뛰어남에도 스스로 무너지는 좌절을 겪는다. 한마디로 남다른 재능은 있지만 이를 감당할 수 없는 심약한 마음으로 인해 커다란 고통을 겪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인물을 구원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
나는 해법을 다방면에서 고심하던 차에 당시에는 잘 알지도 못하는 불교였지만 막연히 여기서 해법을 찾고자 했다. 처음에는 아는 것도 별로 없고 해서 일단 주인공이 명상 훈련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얻고 자신의 큰 승부 앞에서 동요하는 심리적 장애를 극복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차후 불교 공부를 하며 채워나가는 것으로 계획했다. 이렇게 이야기의 얼개를 설정해놓자, 이제 내게 남은 일은 불교를 공부해서 주인공을 구원하고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나의 불교 공부는 특이하게도 이렇게 시작되었다.
불교를 공부해보니 불교에는 종교적 측면과 학문적 측면이 있는데, 나는 종교적 측면보다는 학문적·심리학적 측면에 매료되었다. 불교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는 불교가 심오한 심층 심리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행을 겸비한 불교 공부
불법을 공부한다고 하니 불교에 조예가 깊은 선배 한 분이 불법은 문자 공부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수행을 병행해야 한다며 위빠사나 수행을 권해 1년간 한 달에 한 번은 천안의 호두마을 수행처에 내려가 1박 2일 혹은 2박 3일 동안 위빠사나 수행을 하게 되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일상에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다 보니 불법의 핵심인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열리게 되었다. 이 중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처음에는 이해하기 매우 어려웠지만 이것에 대한 이해가 생기자 이것이 내게 준 충격은 상당했다. 맑은 대낮에 벼락을 맞은 느낌이랄까, 이 마음은 충격과 놀라움에 휩싸게 되었다. “오호, 이 세계에는 어떤 것도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없구나. 이 마음을 주재, 주관하는 자아라는 것도 없고, 이런 역할을 한다고 굳게 믿어온 자아라는 것은 단지 무지에 근거한 착각이 었구나”라는 인식은 내 인생에서 가장 놀랍고 충격적인 배움이었다.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심리학에 대한 관점과 이해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불교의 연기적 관점과 심리학의 독립변인과 종속변인의 관계를 탐구하는 실험 방법은 매우 유사한 것이라 양자의 연구 결과는 많은 부분이 일치하기 때문에 서로의 발전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난해한 불교의 교설은 현대의 다양한 심리학 연구를 통해서 보다 쉽고 친숙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고, 최근에 심리학에 몰아닥친 알아차림(mindfulness)의 영향 덕분에 불교적 관점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다. 아직 많은 심리학자들이 주체로서의 자아 인식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앞으로 불교적 조망의 수용을 통해 이 점도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나의 불교 공부는 다소 엉뚱하게도 가공의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서 시작되었지만, 이 공부를 통해서 나는 이 우주와 삶에 대한 전체적 조망과 인간 마음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최일호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사회인지 전공). 성균관대 아동학과 연구교수,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 고려대 지혜과학센터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서강대 평생교육원 교수, 고려대 교육대학원(상담심리전공) 강사, 대원아카데미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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