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불교는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이어져오고 있나

티베트 불교

양승규
동국대 WISE캠퍼스 티베트대장경역경원 연구원


한때 티베트 불교를 라마교라고 부른 적이 있다. 이것은 스승인 라마들을 중심으로 불교의 가르침이 전승되고, 계승된 불교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는 어느 나라 불교보다도 순수하고 엄밀하게 인도 불교의 전통을 잘 계승해 발달시켜왔다.

국가 불교의 성립
티베트에 최초로 불교가 전해진 것은 쏭짼감보왕 때인 7세기경이다. 티베트의 전 종족을 통합한 왕은 퇸미쌈보따를 인도에 파견해 인도 글자를 토대로 티베트 글자를 만들게 하고, 티베트 문법을 정립했다.

티송데짼왕은 날란다대학의 학장인 샨따락씨따를 초청했다. 샨따락씨따는 빠드마삼바바와 함께 최초의 티베트 사원인 삼예 사원을 완성했다. 설일체유부의 전통에 따라 처음으로 티베트인들에게 구족계를 주었다. 우수한 젊은이를 선발해 범어를 배우게 했다.

까말라쉴라는 중국 불교를 대표하는 마하연 선사와 논쟁을 벌이는 삼예논쟁에 참가했다. 이 논쟁에서 까말라쉴라는 돈오를 주장하는 마하연 선사를 철저하게 논파했다. 이후 티베트 불교는 오롯하게 인도 불교를 받아들였다.

불교 교단이 점차 안정을 찾아가자, 역경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역경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 번역어를 통일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왕은 예쉐데를 중심으로 인도와 티베트의 학승들이 힘을 합쳐 『번역명의대집』을 만들었다. 티베트 최초의 역경 목록집인 『덴깔마목록』도 완성되었다. 이어서 『팡탕목록』과 『침푸목록』이 만들어졌다.

티쭉데짼 왕이 죽고 나서 파불의 왕 랑달마가 즉위하자 토번 왕국도 몰락하고, 불교도 급속도로 붕괴되었다.

종파 불교의 확립
불교 부흥 운동은 동쪽의 청해 지방과 서쪽의 아리, 중앙 티베트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불교 교단이 정돈되자 아리의 왕 장춥외는 인도의 대학승 아띠샤를 티베트에 초청했다. 아띠샤는 티베트인들을 위해 『보리도등론』을 설명했다. 이 『보리도등론』에서는 계율을 지키면서 대승의 보살행을 실천하고, 아울러 딴뜨라 불교의 수행으로 보다 깊은 깨달음의 길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아띠샤의 가르침은 돔뙨빠로 계승되고, 이것은 짼아와 자율와에 의해 교계파와 발전했고, 뽀또와 린첸쌜과 쌰라와 왠땐 등에 의해 교설파로 발전했다.

싸꺄파는 씨족 쾬씨에 의해 성립한 종파다. 싸까파의 다섯 창시자로는 쾬씨 직계의 꾼가닝보, 소남쩨모, 닥빠갤짼, 싸꺄빤디따 뀐가갤짼, 팍빠가 있다.

싸꺄파 교학의 특색은 도과(道果)설이다. 도과설은 독미의 가르침에서 유래한다. 바깥세상은 마음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음의 작용이고, 마음도 환상으로 존재한다. 이 환상은 독자적인 자성이 없는 빈 것이다. 이것을 체득하는 것이 무집이고, 이것 외에 별도로 성취되는 열반이 없다. 따라서 ‘윤회열반무차별’이다.

까뀨빠는 부처님의 경지를 얻기 위해 대인(大印)의 법을 설한다. 이 대인의 가르침을 티베트에 전한 이가 말빠 최기로되다. 말빠의 가르침은 밀라래빠로 이어지고, 밀라래빠의 제자에는 감뽀빠가 있었다. 감뽀빠에게는 뒤쑴켄빠와 팍모두빠가 있었다. 뒤쑴켄빠로부터 까르마까규와 팍모두빠로부터 팍두까규의 전통이 생겼다.

티베트에서 제일 나중에 성립하지만 가장 영향력이 큰 종파가 겔룩빠다. 겔룩빠를 세운 쫑카빠 롭상닥빠는 『현관장엄론』, 『입중론』, 『구사론』 등의 현교와 『비밀집회딴뜨라』, 『시륜탄뜨라』 등 밀교에 대한 가르침을 여러 스승들로부터 배웠다. 또 문수보살을 친견해 이해하기 어려운 교학의 핵심을 물어 해결할 수 있었다. 까담빠의 가르침인 도차제(道次第)의 가르침도 배웠다. 이를 토대로 쫑카빠는 현교의 교학을 집대성한 『보리도차제광론』과 밀교의 교학을 집대성한 『비밀도차제광론』을 저술했다. 이 외에도 『선설심수』와 『중론』의 주석서인 『정리대해』를 저술했다.

겔룩빠의 발전
쫑카빠의 제자로는 갤찹 달마린첸과 케둡 겔레뺄상, 게뒨둡 등이 있다. 갤찹 달마린첸은 불교논리학, 반야학 등 현교에 대한 다수의 주석을 남기고 있고, 케둡 겔레뺄상은 밀교에 대한 뛰어난 주석을 남기고 있다.

쫑카빠가 열반한 후 그 가르침을 펴기 위해 라싸 근교에는 간덴, 쎄라, 데붕과 같은 대규모의 승원이 세워졌다. 시가체에는 따시룽보 사원이 건립되었다. 따시룽보를 건립한 겐뒨둡이 입적하자 겐뒨갸초가 환생자로 인정되었다. 겐뒨갸쵸가 입적하자 다음 환생자로 쏘남갸초를 찾아냈다. 이 환생자가 3대 달라이라마로 추대되었다. 그후 5대 달라이라마 아왕 롭상가초가 티베트의 실권을 장악했다.

겔룩빠 안에서는 뛰어난 학자들이 출현했다. 잠양쌔바는 유명한 『대학설』을 저술했다. 짱꺄 로배도제는 『짱꺄학설강요서』를 지었다. 꾄촉직메왕보는 『학설보환』을 저술했다. 투갠 롭상최기니마는 티베트 종파의 교의 체계를 설명한 『학설수정경』을 저술했다.

18세기에 들어와 달라이라마가 정권의 조정자로서의 기능을 점차 상실해가자, 정치적으로 겔룩빠에 눌려 지내던 여러 종파로부터 반격이 일어났다. 이것은 동부 티베트 캄에서 ‘무종파주의’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 중심에는 켄쩨왕보, 꽁뚤 왼땐갸초, 미팜갸초, 직메링빠 등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13대 달라이라마에 의해 존중되어 겔룩빠 이외의 종파의 서적들도 활발하게 인쇄되어 보급되었다. 14대 달라이라마 역시 인도 망명이라고 하는 정치적인 대혼란을 겪으면서도 티베트 불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과 티베트의 각 종파들이 화합중이라는 불교 본래의 정신에서 조화롭게 수행할 수 있도록 다방면에서 지원하고 있다.

지금 티베트 불교는 여러 가지 안팎의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그것은 결국 티베트 불교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인도 불교의 소중한 전통이 곧 티베트 불교의 정체성이 되었다는 점에서 목숨을 건 수행자, 역경가, 주석가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랄 뿐이다.

양승규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불교를 공부했다. 현재 동국대 WISE캠퍼스 티베트대장경역경원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티베트 경론을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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