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에서 가운데 중(中)의 의미

B에게 보내는 여섯 편지

중용, 환중, 중도

정세근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친애하는 B에게 :
B여. 저번에 젊은이에게 ‘머뭇거리느라 허송세월하지 말고, 어느 길이든 가보라. 잘못된 길임을 알고 되돌아오는 것이 더 빠를 수 있다’고 한 말에 인상이 깊었다고 해주어 고맙소. 주저하지 말고 일단 떠나보라는 것인데 나라고 별수 있었겠소? 머뭇거리다 시간만 보내고 말았소. 내 삶이 곧 그렇소. 그래서 끊임없이 수행해야 하는 것이오.

불교도 근기(根氣)를 말하오. 누구는 잘 참고, 누구는 잘 못 참지 않소? 그러나 그렇게 좋은 근기를 타고난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소? 아침에 슬펐다가도 점심에 기뻐하고 저녁에 다시 우는 것이 우리네 사람의 모습이 아니지 않소?

그래서 사람은 자꾸 ‘가운데’를 찾으려 한다오. 근기가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저 그런 듯해도 되도록 많은 사람을 기준으로 삼으려 한다오. 감정도 그렇소. 기쁨도 좋지만 슬픔이 다가올 때 그 나락에 빠지지 않으려고 가운데의 마음가짐을 누리고 싶은 것이오. 그래서 우리가 ‘일반인’, ‘평상심’을 말하는 것이오.

가운데 중(中)의 의미
B여, 내가 들려주고 싶은 것이 바로 가운데의 이야기요. 도대체 가운데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자주 일컫는지,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말해보고자 하는 것이오.

전통 사상은 가운데, 곧 중(中)을 강조했소. 중이란 그 생긴 모양처럼 가운데를 제대로 꾄 것이오. 그래서 ‘적중(的中)’이라고 할 때 쓴다오. 여기서 ‘적(的)’은 과녁을 가리키니 그 가운데를 뚫어 얼마나 좋겠소.

그런데 문제는 가운데를 잘 맞히는 것만이 훌륭한 것이 아니라는 데에서 생기오. 과녁의 가운데는 정해져 있고 화살은 그리로 날아가기만 하면 되지만, 사람의 삶에서 가운데는 거기가 어디인지도 잘 모르겠고 때에 따라 옮겨 다니기 때문이오. 과녁의 가운데는 물리적 세계지만, 사람의 가운데는 생리적 세계라서 그 가운데가 자꾸 옮겨 다닌다오. 그러니까 사람의 가운데는 그것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오. 우리말에서는 그래서 그런지 ‘맞히다’와 ‘맞추다’를 구별하오. 맞히는 것은 정답이나 화살을 적중하는 것이고, 맞추는 것은 음식의 간을 비롯해서 일이나 옷을 적당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오.

B여, 물어봅시다. 떡을 나누어 먹는다고 할 때 둘이 나누어 먹으려고 정확히 반으로 자르는 것이 정말로 가운데를 지킨 것이오? 점심을 먹은 사람도 있고 못 먹은 사람도 있겠고, 덩치가 큰 사람도 있겠고 작은 사람도 있겠고, 떡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고,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겠고 적은 사람도 있겠고, 떡을 만드는 데 힘쓴 사람도 있겠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고, 하다못해 힘센 사람도 있겠고 힘없는 사람도 있겠고 말이오. 사람이 둘에서 셋으로 나가고, 집에 두고 온 식구까지 생각하면 생각은 복잡해질 수밖에 없소.

그래서 여기서 가운데는 적중이 아니라 적당(適當), 적절(適切), 합당(合當)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오. 무엇이 적당한 것이오? 어떻게 해야 적절하오? 내게 합당한 것이 남에게도 합당하오?

여기서 유가와 도가와 불가의 가운데를 말해보고자 하오. 다들 가운데를 말하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오.

생활 속의 중용
유가는 생활 속의 ‘중용(中庸)’을 강조하오. 여기서 ‘용(庸)’은 ‘용(用)’으로 쓰임을 가리키오. 일용(日用)에서 가운데를 찾고자 하는 것이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禮)의 역할이오. 그러니까 배고픈 사람과 배곯은 사람이 있으면 배곯은 사람에게 떡을 많이 주는 것이 중용이오. 그리고 늙은이와 젊은이가 있으면 늙은이를 챙기는 것이 중용이오(여기서 젊은이는 당연히 아기나 어린이가 아니오). 그래서 중용은 아무리 가장자리로 가더라도 중용일 수 있소. 나는 점심을 먹었으니 떡은 점심 못 먹은 사람에게 모두 넘겨주는 것이 중용이라는 이야기요.

생각해보시오. 중용은 『예기(禮記)』라는 책의 작은 편에 불과했는데 얼마나 중요하면 주자 선생이 이렇게 독립을 시켰겠소? 이렇게 예는 다양한 경우의 원칙을 만들어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오. 우리가 살아가는 데 보통 사람은 형벌이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질서 없이 살아갈 수는 없소.

절대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환중
도가는 옳고 그름이나 선과 악의 기준을 넘어설 것을 바라오. 왜냐하면 나에게 옳은 것이 남에게는 그른 것이 되고, 남에게 옳은 것이 나에게는 그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오. 결국 사람의 기준은 이렇게 제멋대로라서 하늘의 기준으로 나아가오. 여기서 사람(人)은 인위이고 문명을 가리키고, 하늘(天)은 자연성이고 본성을 가리키오. 인위적인 세계에서 떠나 절대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볼 것을 도가는 권하는 것이오.

그것을 장자는 ‘환중(環中)’이라는 표현으로 그려낸다오. 그것은 반지의 가운데를 가리키오. 그 가운데는 안이오, 밖이오? 안팎을 떠나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돌고 도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장자는 ‘도추(道樞)’라는 비유도 우리에게 건네고 있소. 도의 지도리, 그러니까 문을 여닫게 해주는 문 밑 꽂이를 가리키오. 요즘으로 말하면 경첩과 같은 것이오. 지도리는 열려 있는 것도 아니고 닫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소? 열고 닫힘을 일어나게 해주는 것일 뿐이오. 그들은 그렇게 그 가운데를 좇았소.

말로 할 수 없음의 중도
불교에서 말하는 것은 ‘중도(中道, Madhyamaka)’라오. 그런데 중도는 번역된 어휘라서 유가와 도가처럼 읽히기 쉽지만 그건 또 아니오. 용수(龍樹, Nāgārjuna)가 강조하는 중도는 다름 아닌 ‘말로 할 수 없음’이기 때문이오. 진리를 말하는 것도, 속세를 말하는 것도 모두 하나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오. 이렇게 말하면 저쪽을 잃고, 저렇게 말하면 이쪽을 잃기에 중도를 알라는 것이오.

진리는 공의 세계지만, 공조차 언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또다시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오. 이를 ‘공공(空空)’이라 말하오. 부정의 부정이오. 그것이 바로 유와 무, 생명과 반야, 중생과 부처조차 없애는 일대원융(一大圓融)의 세계이자 일체무소득(一切無所得, anupalabdhi)의 세계요.

B여, 불공(佛供)을 드리기보다 불공(佛空)을 누려보길 바라오.

정세근
국립대만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사)한국철학회 제53대 회장, 국가미래교육을 위한 전국철학회연석회의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노장철학과 현대사상』, 『윤회와 반윤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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