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 스님의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해 있다
‘나’라는 말이 가지는 뜻
‘나’란 존재가 어떤 실체(實體)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나’라는 말의 뜻부터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나’란 말은 첫째 남하고 나를 구별하는 대명사입니다. 곧 ‘나’라는 말은 ‘너’라는 말을 상대로 해서 존립된 말이므로 실제로는 네가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나’ 아닌 것은 ‘너’고 ‘너’ 아닌 것은 ‘나’라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일체를 부정한다
그러면 ‘너’ 아닌 어떤 것이 ‘나’인가?
여기 있는 모든 것이 다 ‘나’는 아닙니다. 곧 ‘나’ 아니란 말은 모든 것이 ‘나’의 상대란 말이 됩니다. 우리가 보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상대는 될 수 있지만 ‘나’ 자체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끌어다 대봐도 그것들이 ‘나’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니고 모두 다 ‘나’는 아닙니다. 그러면 진리가 ‘나’인가? 그것도 ‘나’일 수 없습니다. 남녀의 성(性)이 ‘나’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다음에 차례로 설명이 되겠지만 ‘나’는 ‘너’가 아니고 선악(善惡)이 아니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 물질도 정신도 아니고 지식도 사상도 아니며 신앙도 진리도 아닙니다.
‘나’는 절대 긍정체이다
우주를 다 부정한 그만큼 ‘나’의 존재를 강력하게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나’입니다. 또한 ‘나’는 끝까지 ‘나’로서만이 ‘나’이지 그 밖에 어느 것과도 섞여 있는 존재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것을 초월해서 있는 것입니다. 중생도 초월했고, 우주도 종교도 철학도 과학도 다 초월한 삶의 주인공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물질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닌 것까지 아니면서 온 우주에서 제일 존귀하고 가장 위대한 능력을 가진 생명의 주인공입니다. 따라서 ‘나’는 물질과 허공을 초월한 존재이므로 차원이전(次元以前)이고 질량이전(質量以前)의 생명입니다. 우주가 창조되기 전의 존재이므로 우주가 파멸된 후에도 없어질 수 없는 영원의 실재이며 일체를 초월한 실체입니다.
‘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나’는 무엇보다도 죽기를 싫어하고 끝없이 살기만 하려 합니다. ‘나’는 물질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고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죽을 수 없는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초월해 나고 죽는 것까지 초월한 것입니다. ‘오직 홀로 우뚝 높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중생들이 나고 죽는다고 하지만 이것은 거짓으로 죽고, 거짓으로 사는 생사의 윤회(輪廻)일 뿐 아주 죽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온갖 활동은 몸뚱이가 사는 육체적 삶만을 위해서 하는 노동입니다.
그러나 몸뚱이는 하나의 복잡한 물질적 결합체에 불과합니다. 피도 물질이고, 세포도 물질이고, 신경도 물질입니다. 이 물질은 아는 능력이 없고 생명이 없습니다. 에너지는 보여지는 객관일 뿐 보는 능력은 없습니다. 수증기가 뭉쳐서 구름이 되지만, 수증기가 흩어지면 구름도 없어지는 것과 같은 예입니다.
따라서 물질은 모든 조화의 주체가 될 수 없고, 생명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조화의 주체 생명의 주체는 물질도 허공도 생각도 아닌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인 육체가 죽는 것은 생명의 근본 실재인 ‘나’와는 근원적으로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죽지도 않고 물질도 아니고 허공도 아닌 ‘참나’는 사고해 추리하고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중국 사람들은 무극(無極)이라고 했고, 무극은 혼돈(混沌)의 상태이니 이름 지을 수 없다고 했으며 성품[性]이다. 도(道)이다. 이치[理]이다. 하늘[天]이다. 영(靈)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불교에서는 ‘불타(佛陀)·해탈(解脫)·열반(涅槃)·보리(菩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이름은 여러 가지지만 우리말로 하자면 ‘마음’이라는 한 말로 결론짓게 됩니다.
이와 같이 ‘나’는 죽을 수 없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실체이고 이름 지을 수 없는 ‘마음’ 자리이며 죽을 수 없는 영원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선(善)이든 악(惡)이든 자신이 지어놓은 과보(果報)를 따라 다음 생(生)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불교의 인과설(因果說)이고 윤회설(輪回說)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과를 지어서 천당으로 가고 지옥에 떨어지고 인간 세상에 태어나는 ‘나’는 ‘참나(眞我)’를 저버린 ‘가아(假我)’의 삶입니다.
만일 ‘참나’에게 천당이 있고, 지옥이 있고, 선악이 있다면 이것은 상대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나’이고, 생사 세계에 구속된 ‘나’이고 모든 것을 초월한 ‘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나’는 육신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죽지 않는 비존재이므로 나는 영원히 죽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절대 자유하려 한다
지구 같은 물질이나 허공은 말도 못하고 생각도 못하고 자유나 구속을 느끼지 못합니다. 물질이나 허공은 생명이 아니므로 무엇을 아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역시 송장이 아닌 살아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물질과 다르고 허공과 다른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과 생명 아닌 것과의 차이입니다. 아는 마음이 없는 물질이나 허공이라면 구속이니 자유니 하는 문제가 애초에 논의될 수 없습니다.
요새 우리가 말하는 자유는 대인관계에 있어서 내가 남에게 기본 인권을 유린당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그런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 객관으로부터 완전하게 해탈된 절대자유를 말하고 상대 세계를 초월해 천상천하(天上天下)에서 훌쩍 벗어난 대자유(大自由)를 말합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모든 것을 인정해서 온갖 것에 걸려 있고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며 모든 망상에 젖어 있기 때문에 ‘참나’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만일 산을 인정하면 산에 구속되고 돈을 인정할 때에는 돈에 구속되고 사랑을 인정하면 나를 사랑에 빼앗깁니다. 술을 좋아하면 술에 미친 만큼 자유가 없어집니다.
모든 것의 주인공이고 근본체인 이 ‘나’는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불에 탈 수도 없고 물에 젖을 것도 없고, 톱으로 잘라봐도 토막이 날 것이 없고 쇠망치로 때려봐도 부서질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죽으려 해봐도 죽을 방법이 없고 아무리 자살을 해보려고 해봐도 자살할 방법이 없는 실재입니다.
중생들은 이렇게 완전한 ‘참나’를 찾을 줄 모르기 때문에 물질을 주인으로 믿고는 물질 앞에서 벌벌 떨고 몸뚱이를 ‘나’로 알기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두려워하는 망상을 냅니다. 적어도 불교의 진리를 믿고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이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몸뚱이나 물질이 내가 아니라는 신념을 가지고 ‘모든 것으로부터 나는 초월해 있으므로, 죽지 않고 대자유할 수 있다’는 확실한 신심(信心)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 이 글은 청담 스님 열반 40주기 법문집, 『인생』(청담 스님 저, 부글북스 刊, 2011년)에서 발췌했다.
청담 스님(1902~1971)
현대 한국 불교의 토대를 세운 선지식. 삼각산 도선사의 증흥조.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역임, 불교신문 창간, 군승제 도입, 신도 조직화, 부처님 오신 날 공휴일 제정 등 수행과 포교에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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