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의 원인은 무명이다
- 자작자수(自作自受)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진리
화령 정사
불교총지종 정사, 보디미트라 ILBF 회장
번뇌는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
괴로움의 원인을 밝힌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사성제 가운데의 집성제이다. 집성제에서 말하는 괴로움의 원인은 한마디로 갈애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번뇌이다. 번뇌는 다른 말로 혹(惑)이라고도 한다. 혹 → 업 → 고의 구조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는 번뇌에 의해 업을 짓고 그것에 따라 고를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번뇌는 고를 발생시키는 근본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번뇌는 탐욕과 화내는 마음[진에], 그리고 어리석음을 모두 일컫는 말이며 그 근저에는 진리에 어두운 무명, 즉 우치가 자리 잡고 있다. 제행무상, 제법무아의 진리를 모르는 우치로 말미암아 자아라는 허상에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접촉하는 모든 대상을 영원히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며, 이를 방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화를 낸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혜를 얻고 무명을 물리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에서 모든 고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렇다.
내 마음의 불안은 탐진치 삼독에서 시작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일상을 관찰해보면 너무나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내 마음이 왜 이렇게 초조하고 불안한지, 왜 내가 이렇게 분노하고 있는지 등등을 잘 따져보면 결국은 탐진치 삼독에 연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은 어리석음 때문에 부질없는 욕심을 내게 되고, 그 욕심의 대상을 가지지 못하므로 거기에 대해 화를 낸다. 나의 욕심을 충족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바깥의 대상뿐만 아니라 자아라고 생각되는 자기의 신체에 대해서도 욕심을 내고 화를 낸다.
어린 시절, 또래에게 내기에서 잃게 되면 그렇게 분할 수가 없다. 내기에서 졌을 때는 더 가지고 싶은 욕심과 잃은 것에 대해 분해하는 마음으로 괴로워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도 그럴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면서 재산을 모으는 데 혈안이 되거나 권력 추구에 매진하다가 마음의 평화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한평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재산과 권력 때문에 단 하루도 편하게 살지 못하고 탐욕과 성냄의 구덩이 속에서 괴롭게 살다가는 인생, 그러나 이러한 탐진치 삼독의 번뇌는 이생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이 업력이 되어 또 다른 생에서 그 고통을 되풀이한다는 데에 더 큰 심각성이 있다.
‘혹’이라는 한마디로 나타나는 탐진치 삼독의 번뇌는 업력을 수반한다. 업은 산스크리트어 카르마(karma)의 의역으로 행위, 행동, 작용, 행하는 힘 등의 뜻이 있는데, 주로 쓰이는 것은 행위의 의미이다.
선업은 좋은 결과, 악업은 나쁜 결과 초래
그런데 불교에서는 업이라고 하면 행위와 그 행위가 가지는 잠재된 힘의 두 가지를 의미한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면 그 순간에 행위는 종료되지만,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행위의 결과 이외에도 그 행위에 따른 여력이 마음에 남아 미래의 고락을 가져온다. 불교에서는 행위 그 자체를 표업(表業)이라고 하며, 행위로 인해 마음에 남게 되는 잠재된 힘을 무표업(無表業)이라고 한다. 업을 정확하게 말하면, 행위와 그에 따른 잠재된 힘을 모두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표업보다도 미래에 결과를 가져올 잠재된 힘으로서의 무표업을 더 중시한다. 말과 입과 뜻으로 짓는 모든 작용은 선악의 어느 방향으로든지 미래에 결과를 낳을 잠재된 힘인 무표업을 지니게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후천적 성격이 결정될 뿐 아니라 미래의 고락의 결과도 달리 나타난다.
무표업에는 선의 무표업과 악의 무표업이 있다. 선의 무표업은 악의 무표업을 억제하고 악의 무표업은 선의 무표업을 억제한다. 우리가 끊임없이 수양해야 하는 이유도 우리의 잠재된 업의 힘을 선의 방향으로 전환해 미래의 고통을 제거하자는 데에 있다.
이처럼 표업이든 무표업이든 선업은 미래에 좋은 결과를, 악업은 미래에 나쁜 결과, 즉 고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업의 힘을 특히 업력이라고 한다. 혹 → 업 → 고의 관계에서 보듯이 고를 초래하는 업은 번뇌에 의한 나쁜 업이며, 특히 무표업이 이러한 업력의 주동적 작용을 하게 된다.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도 업(業)
번뇌에 의해 초래되는 업은 우리의 몸과 입과 뜻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를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이라고 한다. 즉 우리의 행위는 온갖 신체적 행위와 언어 활동, 그리고 여러 가지 마음의 움직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마음으로 생각한 것이나 의지 작용이 신체와 언어에 의해 나타난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실제적 행위뿐만 아니라 단순히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도 업으로 간주해 고를 초래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특히 삼업 가운데에서 의업(意業), 즉 사업(思業)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데, 이것은 불교가 겉으로 드러난 결과보다도 거기에 이르는 동기나 과정을 더욱 중요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마음이야말로 우리에게 고를 가져오는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과응보와 자업자득이라는 업의 원칙
그리고 업에는 선악의 행위에 대해 그에 따른 결과가 반드시 있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는 반드시 자기가 받는다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대원칙이 있다. 자기가 선업을 지으면 미래에 좋은 결과가 올 것이고, 악업을 지으면 미래에 고를 초래하게 된다. 이것을 ‘선인낙과, 악인고과(善人樂果, 惡人苦果)’라고 한다. 보통 ‘선인선과, 악인악과(善人善果, 惡因惡果)’라고도 하지만 교리적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정확한 용어가 아니며 선인낙과, 악인고과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과에는 선하고 악한 것이 없으며 무기(無記)이기 때문이다.
선업을 지으면 좋은 과를 받고 악업을 지으면 나쁜 과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여기에 예외가 있다. 즉 선업만은 행위 주체자가 아닌 자에게 그 결과를 돌릴 수 있으며, 또한 선인에 인한 낙과를 낙과만이 아닌 깨달음의 지혜를 획득하기 위해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회향(廻向)이라고 한다. 특히 선업에 의한 자기의 낙과를 다른 중생을 위해 회향하는 것을 중생회향(衆生廻向)이라고 하며, 또 이를 자기의 깨달음의 지혜를 얻기 위해 돌리는 것을 보리회향(菩提廻向)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선인낙과가 원칙이며, 낙과는 인간계나 천계의 행복한 상태를 의미하나 이것은 언젠가는 끝이 날 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낙과를 고로부터의 영원한 해탈이라 할 수 있는 열반으로 돌리는 것을 실제회향(實際廻向)이라고 하며, 중생회향, 보리회향과 함께 삼종회향(三種廻向)이라고 한다. 이러한 회향의 사상에 의해 불교는 선업에 대한 당위성을 지니며 한없는 자비의 확대가 요구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불교에서는 집성제를 통해 괴로움을 초래하는 원인을 분석하고 그것이 탐진치의 삼독에 의한 것이며 이 삼독의 행위는 악업이 되어 미래에 고를 가져온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화령 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교총지종 교육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보디미트라 ILBF(국제재가불교포럼) 회장으로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 『불교 교양으로 읽다』, 『담마빠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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