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을 찾아서 | 나의 불교 이야기

불교는 내 삶의 길잡이

권건우
연세대학교 철학과 석사과정


유년기의 나는 절을 싫어했었다. 여타 어른들과는 다른 모습을 한 스님들이 낯설게 느껴졌었고, 이해할 수 없는 주문과 같은 말들을 외는 모습은 익숙해지지 않았었다. 비빔밥이 유치원생·초등학생의 입맛에 맞을 리도 없었다. 부모님의 노력에 장단을 맞추어 절에 꾸준히 다니고자 시도했으나, 절에 잘 나가야 할 동인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이후 중학생이 되었을 때 친한 친구를 따라 동네 절을 몇 번 나가다가, 청년부 지도 스님의 스마트폰 배경 화면이 미스에이 수지라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던 경험을 마지막으로 절을 다니는 일은 그만두게 되었다.

불교와의 인연
불교와 본격적으로 연을 쌓았던 것은 고등학생 때부터였다. 가족들과 나들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서 노을을 보며 모종의 슬픔을 느꼈었던 경험, 오래 준비한 시험을 끝마쳤더니 뿌듯함보다는 허탈함을 느꼈던 경험 등 그때까지의 온갖 소소한 경험들이 축적되어서,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일이 있기는 할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집 서가에 꽂힌 『숫타니파타』와 『법구경』을 우연히 찾아 읽게 되었다. 인생의 허무함과 고통스러움의 원인에 관한 논의와, 이를 초월한 경지로서의 ‘깨달음’이 그에 대한 대안이 된다는 주장은 내게 중요한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뜨뜻미지근한 자기 계발서들에 익숙해 있던 나로서는 ‘이런 삶은 올바르며 행복하고 저런 삶은 그르며 불행하다’는 단언 투의 서술 형식은 불교와 더불어 철학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할 충분한 동인이 되어주었다.

수행의 시작
두 책을 접한 후 나는 그 가르침들을 내 삶 속에서 구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육체의 감각적 욕구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두 책의 주 메시지에 대한 나의 이해였고, 그래서 내 ‘수행’도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독자적인 방법으로 명상 수행을 시도하기도 하고, 욕구와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나만의 방법들을 마련하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이러한 ‘수행’은 졸음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식의 사소하지만 긍정적인 영향이 있었는가 하면, 지는 노을을 감상하는 일에 대해서조차 자책하는 태도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와 이해는 불교 공부가 이어짐에 따라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선불교 문헌들과 대승불교 문헌들은 감각적 욕구 자체보다도 이를 다루고 통제하는 주체가 가진 의식에 더 주목한다는 점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감각적 욕구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고자 하는 태도가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도 배우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때까지 읽었던 갖가지 불교 문헌들의 상이한 주장들을 어떻게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이후 학교에서 불교 관련 수업들을 수강하고 책들을 읽은 후에야 비로소 내가 수행하고 공부하면서 마주했던 문제들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철학적 문제들로 다뤄져왔음을 알게 되었다. 가령, 누군가가 해탈한 이후에도 육체와 그 욕구들은 여전히 남아 있는지, 있다면 이는 그 깨달음이 낮은 단계의 깨달음임을 함축하는지 등의 문제는 부파들 사이의 분열을 일으킬 정도의 심각하고도 중요한 철학적 문제였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나아가서 불교가 공통적으로 ‘깨달음’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것에 비해, ‘깨달음’이 정확히 무엇을 일컫는지의 논의는 종결되지 않은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단순히 정통과 이단을 나눔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성찰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현행하는 문제들이라는 점이 내게는 매력적이다.

이제 불교는 내 삶의 지침서
이처럼 불교는 내가 내 삶의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고 답을 내리는 데에 언제나 도움을 준다. 이미 완성된 지도와 같은 길잡이로서가 아니라, 닿을 듯 말 듯 나보다 언제나 몇 걸음 앞서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을 주는 길잡이로서 말이다. 앞으로도 불교를 길잡이로 삼아 공부를 이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또 내 공부가 다른 사람들의 수행과 공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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