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이 이름을 지은 구례 화엄사 각황전 | 사찰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

임금을 깨닫게 해준 부처님 이야기

그림 | 한생곤

돈독한 신심과 불보살의 가피력
불교적 상상력은 문학적 상상력의 촉매 역할을 종종 하곤 한다. 특히 화엄 광명을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웅장한 규모와 단아한 멋을 자랑하는 구례 화엄사 각황전은 장육금신(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벽면에 화엄석경을 새긴 장육전(丈六殿)이 있었던 곳이다. 화엄사가 해동의 근본 도량임을 입증하기 위해, 화엄석경의 거대한 법당을 세움으로써 중생계를 연화장세계로 꽃피우기 위해 부처님의 화엄의 힘을 빌려 장육전이 건립되었을 것이다. 화엄사 장육전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지만 벽암 각성(1575~1660)의 제자 계파 성능에 의해 3년간에 걸쳐 중건되었으며, 완공 후 숙종이 사액(賜額)해 각황전이라 했다. 이에 얽힌 설화는 비록 가진 것이 한 푼 없어도 신심이 돈독하고 지극 정성으로 노력하면 불보살의 가피력을 받아 어떤 불사도 능히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장육전 불사 원만 회향 백일기도
화엄사 중창조 벽암 각성의 뒤를 이어 주지가 된 계파 스님은 스승이 못 다한 일을 이루고자 스승에게 한 가지 약조를 했으니 장육전을 중건하는 일이었다.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불사라 선뜻 실행할 수 없었지만 장육전 중건의 서원을 세운 계파 스님은 중창 불사의 화주가 되어 불사를 시작했다. 백여 명의 대중 스님들과 함께 대웅전에서 장육전 불사 원만 회향 백일기도를 올렸다.

백일기도가 끝나는 회향 일에 한 노스님이 대중을 불러 일렀다.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문수보살이 나타나 이르기를 “불사를 이루고자 한다면 대중 스님들 가운데 물 묻은 손으로 밀가루를 만져서 밀가루가 묻지 않는 사람을 화주승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이한 일은 다른 몇몇 스님들도 모두 똑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사시마지(巳時摩旨) 올릴 때 대웅전에 물 항아리와 밀가루 항아리를 준비하고 계파 스님이 “만일 물 묻은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은 스님이 있다면 산승과 함께 장육전 불사를 각별히 의논할까 하는 바이오.” 대중 스님들 모두 이를 문수보살의 현몽 계시로 알고 계파 스님의 지시대로 실행했다. 하지만 모든 대중 스님들의 물 묻은 손에는 밀가루가 묻어났다. 그러자 노스님과 대중 스님들은 마지막으로 부엌에서 대중을 시봉하는 공양주 스님을 불러보는 수밖에 없었다.

공양주 스님의 두 손에 물을 묻혀 밀가루 독에 손을 넣도록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밀가루가 손에 묻어나지 않았다. 세 번이나 해도 마찬가지였다. 대중은 모두 일어나 공양주 스님을 향해 삼배하고 장육전 불사의 화주승 소임을 맡겼다. 계파 스님은 “그대가 10년을 공양주로 일한 복력이 백여 명의 대중 가운데 가장 수승하기에 오늘 시험에서 이적이 일어난 것이오. 이는 내가 짐짓 시험한 것이 아니라 꿈에 지리산 주인인 문수 대성께서 지시한 대로 시행한 것이니 그대는 문수 대성께서 선택하신 화주승이오. 그러니 대 시주자를 잘 얻어 장육전 중창 불사를 이루도록 하시오.” 공양주 스님은 이를 받들었다. 하지만 공양을 짓는 수행만 했을 뿐 화주에는 전혀 인연이 없어 걱정이 태산 같았다. 스님은 밤새껏 대웅전에서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비몽사몽 간 한 노인(문수보살)이 나타나 말하기를, “그대는 걱정 말라. 내일 아침 화주를 떠나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공양주 스님은 문수보살의 말씀에 따라 다음 날 새벽 아무도 몰래 화주 책을 품속에 간직하고 대웅전을 향해 “맡은 바 화주 소임을 잘 완수하도록 가호를 내려주옵소서”라며 절을 하고 산문을 나섰다. 그런데 절을 나서서 처음 만난 사람은 시주는커녕 움막에서 혼자 살며 간혹 절에 먹을 것을 구하러 자주 들르는 거지 노파였다. ‘이런 거지 노파에게 어떻게 장육전을 지어달라고 권한단 말인가.’ 하지만 스님은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간밤 꿈에 나타난 노인의 말을 떠올리고 거지 노파에게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오! 대시주시여! 장육전 불사를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시주를 권하고 절을 계속했다. 거지 노파는 처음에는 서로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농담으로 그런 줄 알았으나 스님의 진지한 모습에 자신의 가난함을 한탄하고 눈물을 흘리며 화엄사를 향해 합장하고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이 몸밖에 없습니다.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환생해 큰 불사를 이루겠나이다. 부디 문수 대성께서는 가피를 내려주옵소서!”라고 말하고는 길가에 있던 연못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스님은 “내가 사람을 죽였구나” 하며 그의 죽음을 말리지 못한 자책감에 화엄사에서 멀리 떠나게 되었다. 어디론가 정처 없이 걸식하며 오륙 년을 떠돌다 마침내 한양에 이르러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공주가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손이 펴지지 않는데 이를 펴는 자에게 막대한 돈을 하사한다는 말이었다.

거지 노파가 죽어 공주로 환생
화창한 어느 봄날, 스님은 왕궁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데, 유모와 함께 궁궐 밖을 거닐고 있는 어린 공주와 마주쳤다.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던 어린 공주는 스님을 보자 “우리 스님!” 하며 반가워하며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공주는 태어나서 6년이 되도록 한 손을 펴지 않아 왕실의 큰 근심이었다. 그런데 스님이 공주를 안고서 펴지 못하는 손을 만지니 신기하게도 손이 펴지고, 손바닥에는 ‘장육전’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거지 노파가 죽어 장육전을 짓는 데 도움이 되고자 서원하고 공주로 환생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화주승을 내전으로 불러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 “오! 참으로 장하도다! 그대의 청정한 큰 서원으로 오늘의 공주로 탄생했구나! 내 장육전 불사를 반드시 이루게 하리라”라며 크게 기뻐하고 감동한 나머지 장육전 중창 불사에 크게 시주하고, 장육전이 완공되자 ‘覺皇殿’이라는 편액을 하사했다. ‘각황’은 ‘깨달은 임금’, 즉 부처님을 의미하면서도 ‘임금을 깨닫게 해준 부처님’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지금도 각황전 옆 장육전이 있던 자리에 각황전 중건을 기념하기 위해 계파 선사가 심었다는 수령 300년이 넘는 홍매가 있다. 이 홍매는 다른 홍매화보다 꽃 색깔이 검붉어 흑매화(黑梅花)로 부르기도 한다.

백원기
동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평생교육원장을 맡고 있다. 『불교설화와 마음치유』,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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