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열린 국민 별장, 청도 북대암

운문사의 호방하면서도 

다감한 기운을 비추는 

거울 같은 암자 


청도 북대암



거, 즉 머물러 살기의 한 방식으로서 ‘거리 두기’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의 '거리 두기'보다 연원이 깊습니다. 그 처음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절집’이 아닌가 합니다.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고, 오고 가기에 편하며, 이런저런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뵙기 좋고, 낮에는 지나치게 붐비지 않고 밤에는 소음이 없으며, 인적이 드물고, 혼자 지내기 좋고, 명상하기에 적절한 곳『율.” 장 대품(大品)』

빔비사라 왕이 최초의 절 ‘죽림정사’를 부처님께 희사할 때 품은 생각입니다. 절은 그런 곳입니다. 세간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정처.

한국의 고찰은 대부분 산중에 있습니다. ‘명산대찰’이라는 말이 하나의 단어로 굳어졌을 만큼 우리의 산과 절은 손바닥과 손등처럼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다들 알 듯 불교 전래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조선 왕조에서 펼친 억불 정책의 결과입니다. 역시 다 좋은 것도 다 나쁜 것도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조선의 억불 덕분에 우리는 산중 곳곳에 자연을 닮은 사람의 풍경을 얻었습니다. 지금처럼 도로가 사통팔달한 세상에서는 산중 사찰도 ‘마을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이 되었으니, 부처님 당시의 죽림정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결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모든 산중 사찰 - 특히 암자는 - ‘국민 별장’이나 다름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린 곳이니까요. 지나는 바람조차도 그곳에서는 주인입니다.

북대암(北臺庵)은 국민 별장의 대표 격이라 할 만한 곳입니다. 북대암은 운문사에 딸린 암자입니다. 하지만 창건 연대는 운문사보다 앞선다고 합니다. 운문사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560년(진흥왕 21)에 운문사, 557년(진흥왕 18)에 북대암이 창건되었다 합니다. 두 절 모두 창건주는 한 신승(神僧)이라 전해올 뿐 문헌 근거는 없습니다.

‘북대암’이라는 이름에는 최소한 두 가지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북(北)’이라는 방위는 운문사와 북대암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운문사를 기준으로 그 북쪽에 북대암이 있다는 것이지요. 현재의 북대암이 운문사의 산내 암자라는 점이 이로써 분명해집니다. 다음으로 ‘대(臺)’는 북대암이 앉은 자리의 특성을 나타냅니다. 보통 우리나라 지명에서 ‘~臺’가 붙은 곳은 조망이 좋은 평평한 곳입니다. 부산 태종대, 지리산 만복대, 설악산 천화대 같은 곳이 그렇습니다.

북대암에 가보면 그 이름의 의미가 선명히 드러납니다. 남쪽으로 운문사 도량이 그림처럼 눈 아래에 걸립니다. 뒤로는 수직의 암벽이 병풍인 양 합니다. 어떤 이들은 운문사를 조망하기 위해 북대암에 오르기도 한답니다. 운문사를 초창한 신승은 북대암에서 운문사 터를 찾았을지도 모릅니다. 산지이면서도 평지인 운문사의 그 안온한 땅을 말입니다.

북대암은 운문사의 운문사다움, 즉 호방하면서도 다감한 기운을 비추는 거울 같은 절집입니다.




글|윤제학, 사진|신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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