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란 무엇인가 | 10분으로 배우는 불교

무아란 무엇인가
- 자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문진건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 교수


자아란? 
심리학에서는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 건강한 ‘자아’의 발달이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심리학적으로 사람이 성장하고 발달한다는 말은 자아가 성장·발달한다는 뜻과도 같다. 어릴 때는 본능의 힘이 강하지만, 성장하면서 점점 자아의 힘이 강해져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본능적인 욕구를 다스리고, 환경이 던져주는 어려운 도전도 해결하면서 마음과 환경 양쪽을 모두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작업을 관장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자아(ego) 또는 자기(self)라고 부른다.

한 사람이 잘 컸다는 말은 마음과 환경을 조율하고 제어하는 자아가 잘 형성되었다는 말이다. 건강하고 힘찬 자아를 지닌 사람은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도 매우 긍정적이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자기개념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한 사람의 전반적인 안녕감과 자신감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자아에 집착하는 이유
다른 한편으로 불교에서는 이러한 자기개념에 집착하는 것을 경고한다.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든지 부정적으로 느끼든지 상관없이 자기에 관한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은 본질을 외면한 채 빈껍데기에 관심을 두면서 허송세월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 존재의 본성을 통찰해 윤회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길을 제시한다. 본성에 대한 통찰을 막는 것이 바로 자아 또는 자기개념에 집착해 그것을 돌보는 것이다(불교에서 ātman이라는 말을 번역할 때, 자아 또는 자기를 엄격하게 구별하지 않고 둘 다 사용한다).

심리학에서는 자기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평생 경험하는 기쁨과 고통의 순환 속에서 혼란을 느끼지 않고 정서적인 균형을 조절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를 존중하고 다양한 삶의 도전을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자신의 능력과 역할에 대한 과신은 깨달음, 즉 존재의 본성을 통찰해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에서는 걸림돌이 된다고 말한다. 물론 불교에서도 자아의 기능과 자기에 대한 신념이 삶을 긍정적으로 조율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건강한 자아의 기능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도 계율을 지키고 바른 생각과 바른 행위를 하도록 강조한다. 왜냐하면 규율 있는 생활이 건강한 자아를 유지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불변하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아의 밝은 측면만을 보여주는 심리학과는 달리 불교에서는 자아에 대한 믿음의 어두운 측면을 더 강조한다. 자아에 대한 믿음은 쉽사리 우리가 자아를 실체적인 존재로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실체적인 존재라는 것은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으며 변함없이 자신의 본성을 영원히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타인과 무수한 만남을 통해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의식하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변함없이 여전히 남아 있는,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의 방식과 역할을 믿게 된다. 이렇게 남과 확연히 구별되는 나에 대한 느낌과 믿음이 ‘마치 변하지 않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나’가 있다는 확신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이 있다고 해서 실제로 ‘나’라는 존재가 불변의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불교에서는 가르친다.

‘실제로 있는 것’과 ‘실제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의 차이
불교에서는 ‘자아’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임시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밀린다왕문경』에서는 수레의 비유를 들며 무아(無我)를 설명한다. 요샛말로 하면, 자동차를 비유로 드는 것과 같다. ‘자동차의 엔진이 자동차입니까? 바퀴가 자동차입니까? 몸체가 자동차입니까? 이 중에 어떤 것도 자동차 그 자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 모든 부분이 온전히 합쳐져야 비로소 자동차라고 합니다.’

자동차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자동차의 실체는 없다는 말이다. 자동차는 여러 가지 수많은 부분이 합쳐져서 일시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자동차는 십여 년의 세월을 못 견디는 것이지만, 타는 동안에는 그것을 자동차라고 부른다. 하지만 자동차의 본질적인 실체는 없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어떤 존재에도 본질적인 실체가 없고 다만 변화와 함께 사그라든다는 사실을 드러내면, 그 존재에 대한 집착이 약해진다.

자아의 존재도 이와 같다. 몸과 느낌과 감각적 이미지와 생각과 의지 작용이라는 다섯 가지 심신 활동(五蘊)이 자아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자아는 마치 다섯 손가락으로 이루어진 주먹과 같다. 원래는 없는 것인데 다섯 가지의 심신 활동과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된다. 주먹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그것은 모든 손가락을 구부려 모았을 때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깨닫게 해주면, 그 사람은 ‘아, 주먹은 임시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구나’라고 알게 된다. 결국 자아라는 주먹은 오온(색·수·상·행·식)이라는 다섯 손가락으로 만들어진 임시적인 존재일 뿐이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우리의 정신 에너지는 우리가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에 모이게 되고, 결국 자유롭게 활동하는 통로를 찾지 못하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의 마음이 ‘나’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과 애착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나라는 믿음이 단지 형성된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면, 오히려 자신의 본성에 대한 통찰과 그것으로부터 오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정신 에너지의 해방이자 진정한 행복이다.

자아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의 가르침
사실 자아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의 가르침은 평온한 마음 상태에서는 이해되고 수용된다. 그러나 평정이 깨어진 마음 상태에서는 오래된 습관적인 인식으로 되돌아가 분노로 나와 남을 가르고 다시 자아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일어나게 된다. 남의 잘못에 집착하고 나에게 쏟아진 비난에 마음이 쓰이면서 자신에 대한 방어가 일어난다. 순간 무아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다.

그러나 무아를 실천하고 수행하는 이는 이러한 순간에 잠시 멈추고, 마음에서 일어난 것은 단지 분노일 뿐 ‘나의 분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무아를 실천하는 것은 생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설픈 자기연민과 방어에서 벗어나서 산란한 마음과 대면하는 것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감정의 불길에 사로잡혀 오래된 습관이 일어나면, 자기방어적인 생각을 멈추고 그것과 직면하는 것이 무척 어렵게 된다. 그러나 무아를 수행하는 사람은 이것을 해묵은 습관을 다룰 수 있는 특별한 훈련의 기회로 삼아 기꺼이 현재의 순간에 의식을 기울이고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린다. 꾸준한 연습과 훈련만이 무아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문진건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통합심리대 철학 및 종교연구소에서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심리상담학과 책임교수를 거쳐 현재는 동방문화대학원대 불교문예학과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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