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의 시선으로 보는 절집 이야기
마음의
옷고름을
푸는 힘
구미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구미 약사암 전경 |
천애 낭떠러지, 산기슭 맨손으로 오르던 그녀
400년쯤 전이었던가, 한 선비는 나를 만나러 왔다 돌아가서 이런 글을 남겼다.
“약사봉은 천애 낭떠러지 아래 있으며 나무판자 다리를 놓아 들어갈 수 있으나 그 아래는 아득하기만 하여 가히 굽어볼 수 없다.” - 최인재의 『일선지( 一善誌 )』 (1618, 선산의 옛 읍지)
아직 남아 있는 기록들 중에 꽤 이름나 있는 것이 그의 글인가보다.
그렇다. 나는 소백산 자락, 현월봉과 약사봉이 솟아 있는 구미 금오산 천 길 낭떠러지에 산다.
벼랑 끝에 아스라이 서서 천년 세월 발아래 선경(仙境)을 즐기고 있는 내 집을 사람들은 ‘구미 금오산 약사암’이라 부르고, 나는 사람들에게 ‘구미 약사암 석조여래좌상’(경북 유형문화재 제362호)이라 불린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천애 낭떠러지 위에 내 집을 짓고, 나를 이곳에 데려다놓은 것이 누구인지, 어떤 원을 세워 약사암이 생긴 건지. 생각해보면 참 다행인 일이다. 가끔은 기록에 남기기보다 마음에 새기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니.
내가 마음에 새긴 것은 나를 여기에 데려다놓은 여인, 통일신라 시대 지리산 자락에 살다 심마니였던 남편을 잃은 여인, 애미다. 사내들과 함께 나를 옮기기 위해 산기슭 맨손으로 오르다 손끝에 피멍이 들었던 그녀의 하산길을 나는 걸음걸음 도왔다.
두꺼운 금칠 안에 숨은 돌부처가 과부를 돌본 이유
애미가 불쌍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겨울처럼 건조하고 딱딱했다. 여느 아낙들처럼 재잘거리지도, 싹싹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그녀를 걱정하고, 환갑을 넘겨 하늘로 돌아갈 때까지 돌봤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나는 지리산에 살던 화강암 바위였고, 그 바위를 지리산 사람들이 정으로 쪼아 두껍게 금칠해 부드럽고 섬세한 표정을 갖게 된 ‘지리산 삼형제불’이었다. 통일신라 마지막 대에 지리산 사람들이 나라를 구하고자 간절한 염원을 담아 지리산 삼형제불을 옮겼다. 지금의 김천 직지사와 수도암, 그리고 내가 있는 구미 약사암으로.
우리 삼형제불은 비록 지금은 떨어져 있지만, 내가 여기에서 하품을 하면, 직지사와 수도암에 있는 두 형제가 재채기를 할 정도로 잘 통하는 사이다.
그런데 나의 마음에 재채기처럼 들어온 한마디가 있었다.
남들은 다들 나라를 구한다는 큰 뜻을 품고 나를 대했지만, 애미는 달랐다. 그녀는 오로지 얼마 전 죽은 남편을 위해서 나를 대했다. 당시에도 꽤 귀한 대접을 받고 있던 나였기에 지리산 사람들이 무리를 조직하고 어떻게 금오산 꼭대기 약사암으로 나를 안치시킬 것인가를 고민할 때, 그녀는 묵묵히 남정네들의 계획을 듣기만 했고, 그대로 따랐다. 그녀는 이 구미의 금오산 토굴에서 의상대사가 수행했는지, 금칠한 내 모습 안에 화강암 돌부처가 있는지 관심이 없었는데, 나를 이 벼랑 끝 암자에 놓고 하산을 준비하며 혼잣말을 한 것이다.
“여보,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어 했던 일을 내가 대신했으니 속이 풀리우? 근데 이제 나는 어떻게 하우, 내 마음을 얘기할 수 있던 유일한 사람이 당신이었는데… 이젠 당신 보듯 여기 와야겠네.”
애미는 그 후로 죽기 몇 년 전까지 힘이 닿는 한 자기 남편의 기일 즈음이면 산기슭을 기어서라도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나지막이 남편에게 이야기하듯 나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나는 그녀를 보며 ‘저 무뚝뚝한 여인이 죽은 남편에게 마음의 옷고름을 풀어놓았구나. 그녀에게 부처는 남편이었구나’ 생각한 적이 있다. 그렇게 그녀는 기록에 남지 않은, 나의 마음에 새긴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금오산에는 손자를 하늘로 보내고 돌탑을 쌓기 시작한 할아버지가 만든 오형돌탑도 있고, 이름 모를 석공이 금오산 산기슭 바위에 새겨놓은 ‘금오산 마애여래입상’(보물 제490호)도 있다.
어떤 마음이 쓰러지지 않는 돌탑을 쌓게 하고, 얼마의 간절함이 마모되지 않는 돌을 깎게 하는 것일까.
그 시작은 늘 마음을 풀어놓는 데서 출발한다. 간절한 염원은 마음의 갑옷을 벗어야 가능한 것이다.
계곡의 모난 돌을 둥글고 예쁜 조약돌로 만드는 것은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라 말했던 법정의 말처럼, 봄볕은 세상을 쓰다듬어 겨울 건조한 나무에 꽃을 피우고, 날카롭던 겨울바람을 따뜻하게 하며, 나그네의 두꺼운 외투를 벗게 하고, 결국엔 마음의 옷고름도 풀게 한다.
그러니 오늘은 따뜻한 봄의 향연 속에 몸을 맡겨보라.
글|정진희
방송작가, KBS <다큐온>, <다큐공감>, <체인지업 도시탈출>, EBS <요리비전>, <하나뿐인 지구>, <희망풍경>, MBC <다큐프라임>, JTBC <다큐플러스> 등에서 일했고, 책 『대한민국 동네 빵집의 비밀』을 출간했다.
사진|마인드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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