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도 없다
이봉춘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돌아보면 내가 걸어온 삶의 여정은 불교라는 이정표를 벗어난 적이 없다. 이러한 삶에 불심의 단초를 심어준 이는 아버지다. 당신께서는 비록 넉넉한 가산이나 높은 학식을 갖추진 못했으나, 자신이 터득하신 불심을 바탕으로 한 바름과 화목이 어우러진 가정을 이루셨다.
매일 이른 아침 아버지는 언제나 정갈하게 면벽좌정하고 ‘능엄신주’를 오래 주송하셨고, 우리 형제들은 등굣길에 앞서 집 안에 갖췄던 작은 불단 앞에 서서 뜻도 모르는 『반야심경』을 외운 후에 나서는 것이 일상이었다. 아버지의 불심은 자신의 존재 방식이자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구현하심이었다. 아버지 나름대로 불심의 요체를 전법 실천하는 방식의 생활을 영위하신 것이다.
내가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도 아버지로부터 훈습된 불심의 씨앗이 자연스레 발아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나의 불교 공부 선택을 가장 기뻐하고 축하해주신 이는 아버지셨다. 특히 방학을 맞아 귀향하게 되면 우리 부자는 불교 역사나 교리 등에 관해 주로 아버지가 묻고 내가 답하며 밤늦도록 격의 없는 대화를 이어가곤 했다. 아버지는 이런 대화를 항상 보람 있어 하셨다. 그런 삶 속에서 아버지는 큰 지혜의 힘을 실천하고자 하신 듯싶다.
이렇게 아버지는 내 불교의 도정에서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준 맨 처음의 스승이자 도반이었음이 분명하다. 오로지 청정불심으로 일관하신 아버지의 삶은 평범했고, 불심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일상에서 모든 번뇌와 고의 근원인 탐진치 삼독심으로부터의 부림을 가히 뵌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와의 세연(世緣)과 불연(佛緣)이 더욱 감사하고 존경스럽다.
행복한 여정
대학을 졸업할 즈음, 나는 불교학을 심도 있게 연마 정진하기 위해 대학원 진학과, 군종법사 입대를 두고 고심했다. 이 두 가지 방향이 내게는 함께 가치 있고 의미가 큰 길들이지만, 현실 여건상 먼저 군에 입대하고 군종법사로 임관했다.
당시 군법사 제도가 아직 초창기여서 감당해야 할 임무는 다양하고 끝이 없었다. 타 종교에 비해 불교의 군내 여건은 많이 열악했고 위상 또한 낮았다. 오직 전법 포교에 분골쇄신하리라 다짐했고, 전후방 각 부대 근무지에 임할 때마다 법회와 인격 지도 교육 그리고 불자 병사 관리에 각별한 관심과 정성을 쏟았다. 그런 가운데 특히 종교 간에 경쟁이 심했던 3사관학교 근무 시절에 고군분투한 기억이 새롭다. 육군종합행정학교에서의 군종학과 창설 시 겪었던 치열한 경쟁전도 감회가 깊다. 또 내 소관도 아닌 부대의 법당 건립의 고충과 미군 부대 카투사 대상 정기 지원 법회, 육군교도소 법회 등도 보람이 컸다. 이렇게 불교의 전법 포교에 대한 열정으로 쉴 틈 없이 뛰어다닌 4년간의 의무 복무 기간을 넘기고, 군 포교라는 소명과 기쁨에 도취되어 이후 13년에 이르도록 군종법사로 복무하게 되었다.
한편 그 분연한 복무 중에서도 가능한 적법 범위 안에서 대학원 진학을 통한 불교학 연마 계획을 실천한 것도 불은의 큰 보람이기도 했다. 그렇게 거의 20년을 분투한 결과, 비로소 조선조 배불정책을 주제로 학문적 한 단락을 이룰 수 있었고, 강단에서 불교학을 전수하는 과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 모두 불교에 대한 앎과 실천을 위한 행복한 여정들이었다.
불교, 그 앎과 삶의 실천
불교와 그 진리 전체에 대해서는 ‘앎과 실천’ 두 가지로 요약해 말할 수 있다. 또 그것은 ‘지혜와 자비’, ‘자리이타’ 등의 덕목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는 여러 갈래의 방대한 불교 교의 체계 전체 또는 일정 부분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불교의 진리를 이해하고 실천한다고 말하더라도 그 내용과 목적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미 붓다의 설법에서도 보이듯이 ‘맹인들의 코끼리 만지기’와도 같은 현상일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출가와 재가의 구분을 포함해, 각 개인의 성향과 근기에 따라 동일 시대에 동일 지역 안에서도 서로 다른 목적과 방식으로 불교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된다. 물론 이 같은 각양각색의 불교가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서로 다른 성향과 근기에 대한 불교의 포용과 섭수(攝受)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사람들의 각기 다른 불교 이해와 실천은 그것대로, 중생세간을 진리의 꽃동산으로 장엄하는 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출·재가자를 막론하고 모든 불자는 당연히 자신의 앎에 따른 실천의 비중을 더욱 깊게 인식해야 할 일이다.
굳이 평범했던 아버지의 불심과 나의 궁색했던 불교 연마 과정의 일단을 앞서 전개한 소이도 이런 성찰의 일단으로 보고자 함이었다. 불교의 진리에 대한 앎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하지만, 자칫 관념적 지식 불교의 이론과 자부심에 매몰되어 그보다 더 중요한 실천행에 소홀하거나 생략하는 상황들도 적지 않게 목도한다. 과연 나 스스로 그런 유의 불교인은 아닌지, 최소한 이해한 불교를 실천하려는 노력은 기울이고 있는지, 새삼 참회하며 살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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