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뛰어넘는 길, 죽음 명상 죽음 마음챙김

특집 | 죽음은 윤회와 열반의 갈림길이다

초기 불교는
죽음을 어떻게 보나

김재성
능인대학원대학교 명상심리학과 교수


죽음을 뛰어넘는 길
죽음은 태어날 때 생명과 함께 받은 선물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명 있는 존재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안고 살아간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무엇을 하더라도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불교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포함한 모든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해 제시된 가르침이다. 사성제로 대표되는 초기 불교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인 멸성제, 즉 열반의 실현에 있다. 열반이란 불사(不死, amata), 적정(寂靜, santi), 무사(無死, amaccu)와 동의어이다. “이 세상에서 욕망과 탐욕을 버린, 지혜 있는 수행승은 불사(不死), 적정(寂靜), 무사(無死)의 열반의 경지에 도달했다.” (『숫타니파타』 Sn 204게)

불교의 목적을 이루는 일은 바로 죽음을 극복한 상태를 이룬 것이 된다. 따라서 죽음은 초기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과 직결되어 있다. 불교는 죽음을 직면해서, 죽음을 뛰어넘는 길을 보여주며, 죽음 없는 상태인 열반을 궁극의 목적으로 제시한다.

죽음에 대한 초기 불교의 네 가지 관점
빠알리 『니까야』와 한역 『아함경』을 중심으로 한 초기 경전에는 다양한 각도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글에서는 필자가 이해하고 있는 네 가지 각도에서 초기 불교의 죽음관을 살펴본다.

먼저 죽음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죽음(死)이란 무엇인가. 중생들이 이런저런 중생(衆生)의 부류에서의 죽음, 죽는 것, 파괴, 사마(死魔)의 死, 일생의 종결,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의 파괴, 신체를 버림, 생명기관[命根]의 끊어짐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죽음이라고 한다.(DN ii, 305)

“云何為死. 彼彼衆生, 彼彼種類沒, 遷移, 身壞, 壽盡, 火離, 命滅, 捨陰時到, 是名為死”(『대정장』 2, 85b16~18)

첫째, 죽음은 바로 나의 문제이다. 타인의 죽음을 목격한 일은 출가 전 고타마 왕자의 출가 동기의 하나였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도 죽는다는 사실을 직면해 살아 있다는 도취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출가를 통해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길을 찾는다.

둘째, 죽음은 살아 있는 생명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 있지 않아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경우도 있는가 하면, 120세 이상까지 장수하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평균 수명 정도 살아간다. 현대인은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의 기술적 발전으로 인해 건강과 불로장생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었지만, 불멸성을 얻는 것은 아니다.

셋째, 죽음은 피하거나 외면해야 할 사건이 아니라, 언제라도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고 받아들일 때, 죽음을 통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 죽음을 주제로 한 명상은 삶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며,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려는 노력을 하게 한다.

넷째, 죽음은 팔정도 등으로 제시된 수행을 통해 열반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했을 때 극복된다. 무상한 삶에서 건져 올린 무상하지 않은 진실, 그래서 죽음 없는 불사(不死)라고 하는 상태가 열반이다. 이러한 네 가지 관점을 통해서 초기 불교의 죽음관을 생각해보자.

열반으로 죽음을 뛰어넘은 붓다
고타마 붓다는 출가 전 노인과 병자와 죽은 자를 만나서, 자신도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직면해 경각심(samvega)을 일으켜, 젊음과 건강과 살아 있음의 도취에서 벗어났다고 한다.(「증지부」 AN3:38) 100년을 살더라도 결국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고타마 싯다르타 왕자에게 죽음이 얼마나 큰 문제였는지 알 수 있다. 우리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언제쯤 알게 될까? 관념적이지만 3~4세에 죽음이 무엇인지 인지하게 되지만, 사람과 사회, 문화에 따라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자각하는 연령에는 차이가 있다. 붓다는 29세에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고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으며, 삶이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통해 실존적 죽음을 받아들였고, 죽음을 벗어나는 길을 찾기로 결심하게 된다. 붓다가 말하는 열반의 동의어로 불사(不死, amata)라는 용어가 있다. 죽음이 없는 상태, 죽음을 극복한 상태를 말한다. 붓다는 출가 후 6년이 지나 불사의 상태인 열반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는 육체의 죽음이 없음이 아니라, 더 이상 태어남이 없기에 죽음도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이해해야 한다. 병과 노환에 의한 육체의 고통을 느끼다가 붓다는 80세에 육체의 죽음을 맞이했다. 외관으로 보기에는 붓다의 완전한 열반은 바로 육체의 죽음을 말한다. 붓다는 육체의 죽음을 맞이했지만, 열반은 죽음 없음의 경험이었다. 열반을 통해 불멸을 성취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붓다가 가르친 죽음 명상
서양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죽음이라는 실존적 사건을 직면하면서 어떤 답도 제시하지 못했다. 죽어야만 하는 운명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붓다는 죽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했다. 죽음을 잊지 말라고 한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바로 붓다가 말한 마라나사띠(maraṇasati), 염사(念死), 죽음에 대한 기억, 죽음 마음챙김과 같지만, 호라티우스가 말한 메멘토 모리가 죽음에 의한 인생의 무상을 말하는데 비해 붓다의 죽음 마음챙김은 죽기 전까지 바르게 정진해서 죽음 없는 경지에 도달할 것을 말하는 희망의 명상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에서 무기력해지고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을 잘 살아서 현생의 최대한의 가치을 이루라고 하는 가르침이 바로 붓다가 가르친 죽음 명상, 죽음 마음챙김이다.

우리는 대부분 태어나기 이전을 알지 못하며, 죽은 이후에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죽은 후 어디로 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음을 모른다는 두려움에 죽음을 회피하고 자신의 죽음을 모른 척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회피하고, 모른 척한 죽음이 한 번 호흡하는 동안에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마음챙기는 죽음 명상은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극복하는 길을 찾는 역설적인 처방책이다. 붓다는 이렇게 제자들에게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의 이익을 말하며, 격려했다.

비구들이여, 사념을 닦으면 큰 결실, 큰 이익이 있고, 불사(不死)에 이르고, 불사를 목적으로 한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사념을 닦고 있는가?(AN iii, 304)

비구들이여, 만일 죽음에 대한 상(想)을 쌓은 마음으로 가득 차서 머물고 있는 비구의 마음이 생명에 대한 욕구에 빠지지 않고, 싫어하고, 돌아서고, 나아가지 않고, 평정 또는 싫어하는 생각이 계속된다면, 비구들이여, 이 비구는 “나는 죽음에 대한 상을 닦았다. 나는 이전과 이후의 구별이 있다. 나는 수행의 결과를 얻었다고 알아야 한다. 이렇게 그는 정지(正知) 있는 자가 된다. 비구들이여, 죽음에 대한 상을 자주 닦으면 큰 결실, 큰 이익이 있고, 불사(不死)에 이르고, 불사(不死)를 목적으로 한다.(AN iv, 49~50)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는 비구는 항상 게으르지 않고, 모든 존재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는 생각[想]을 얻는다. 그리고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 무상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며 따라서 괴로움에 대한 생각과 무아에 대한 생각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죽을 때 두려움도 몽매함도 없이 죽는다. 만약 이 생에서 불사(不死)를 얻지 못했다면 죽은 후 좋은 곳에 태어난다고 한다. (「청정도론」 2권, 39쪽)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고, 죽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수행하는 자들은 죽음을 넘어서는 불사(不死)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초기 불교 죽음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재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사 및 석사 졸업, 일본 동경대 대학원 인도철학불교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불교대학원대 전임강사, 대원아카데미 교수를 거쳐 현재 능인대학원대 명상심리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불교의 이해』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붓다의 말씀』, 『위빠사나 수행』, 『마음챙김과 심리치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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