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놓아야 복이 들어온다 | 미니멀 라이프

비워놓아야 

복이 들어온다

이현정
드라마 작가


마법의 옷장
우리 집에는 마법의 옷장이 있다. 분명히 옷장 안에 옷들을 넣어둔 것 같은데, 외출하려고 열어 보면 입을 옷이 없다.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거라면, 내 눈에 안 보일 리가 없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버리라는 정리의 여왕님 말씀받자와, 하나를 버리면 반드시 하나를 사 넣는 제로섬 게임을 실천했다. 그런데 도대체, 그 많던 옷들은 어디로, 누가 다 옮겼단 말인가.

지난 6년 동안 이사를 세 번이나 하게 되었다. 처음엔 당시 다니던 사무실 가까이로, 다음엔 불어닥친 부동산 광풍의 여파로, 그리고 남편의 타 지역 직장 이동 문제로.

이사할 때 직원분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물건이 ‘대형 화분’과 ‘책들’이라기에 제일 먼저 화분을 정리했다. 그리고 서재 두 면을 차지하던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화분 정리는 쉬웠지만, 읽지도 않으면서 꽂혀 있는 것만으로 나를 지식인인 척하게 해준 책만큼에는 미련을 떨었다. 언젠간 읽을 거야. 자료 조사에 필요한 거야. 이건 비싸게 주고 산 거야.

그런데 이사를 거듭하다 보니 보이기 시작했다. 이사할 때 말고는 내 손에 또다시 잡힐 일은 없을 책들이. 아름답게 기부도 하고 알라딘(중고 서점)에도 실어다준 덕에 서재 두 면을 차지하던 책들이 한 면으로 줄어들었고 마침내 책장 한 면의 절반 정도로 썰렁해졌다. 지난번 집과 같은 크기인데 서재가 두 배로 넓어 보이는 마법이 찾아왔다.

책장만 줄이면 수준 떨어져 보일까 봐 옷장도 함께 정리하기 시작했다. 분명 지난번 이사 때 고르고 골라 남겨두었는데, 다음 이사가 되면 또다시 버릴 게 나타나는 게 신기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려버린 내 신체 사이즈 탓을 하며 의류 보관함을 뻔질나게 드나들길 수차례. 곁에서 지켜보던 남편이 그러는 것이다. 이러다 나까지 버리는 거 아냐? 더 이상 설레지 않는 남편의 낡은 티셔츠를 벗겨서 의류 보관함에 내다버렸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그렇게 엄청난 옷들의 대탈출이 벌어졌음에도, 옷장에는 여전히 옷들이 가득하고 외출할 때는 입을 옷이 없는 거다. 분명 나는 미니멀 라이프 전도사인데. 우리 집에 와본 사람들은 어쩜 이렇게 깔끔하고 짐이 없냐, 나도 버릴 거 정리 좀 하고 가볍게 살아야겠다 반성을 하고 돌아들 가는데. 키친타월 하나를 사도 대용량 묶음이 아닌 한 개에 1,000원 하는 낱개로 그때그때 다이소에서 사다 쓰는 이 나의, 옷장은 대체 왜 그런 걸까.

썩지 않는 옷들의 폐해
우연히 TV에서 동남아시아에 솟아나고 있는 ‘옷 무덤’들을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수많은 나라에서 버려진 옷들이 그곳으로 가 시체처럼 쌓여 있었다. 사람의 신체는 썩어서 거름이 되어주는데, 사람이 입다 버린 옷들은 썩지도 않는단다. 그 속에 내가 버린 옷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욕지기나 나왔다. 채식주의자가 도살 장면을 목격한 뒤로 채식을 시작하는 경우처럼, 나 역시 그날 이후로 버리는 것보단 사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빽빽해서 옷 하나 꺼내기 힘들던 옷장 안에 숨 쉴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드디어 옷장에서도, 마음과 함께 무겁던 몸까지 가벼워지는 마법이 일어났다.

책장과 옷장을 비롯해 집 안 전체에 움직일 공간이 많아지니 좁은 집이 넓게 느껴졌다. 내 마음도 넓어지고 평온함이 찾아들었다. 어느 풍수학자의 말처럼, 비어 있는 공간에 복이 들어와 앉은 것만 같았다.

평온한 마음으로 책장 앞에 다가섰다. 세 번의 이사 끝에 썰렁해진 책장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월든』을 찾아 들었다. 1845년 2년 2개월 남짓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간소한 삶과 생태주의적 삶의 지침서. 19세기에 쓴 책이 20세기를 지나고 나의 숱한 이사 부침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건, 내 삶도 짐 가지들이 줄어들 듯이 좀 가벼워지길. 기껏 조성해놓은 집구석의 여백이 계속 지켜질 수 있길 바라는 일종의 부적 같은 거였다. 갑갑하고 머리가 복잡할 때면 가끔 한두 페이지를 읽으며 마음을 가볍게 해준 그 책을, 이번 기회에 오래간만에 집어 들고서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실은 내가 그동안 이 책의 제목을, ‘웰던’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단순하게 산다는 게 꼭 물건 정리만은 아니다
미니멀 라이프가 이렇게 어려운 일인 거다. 줄이고 또 줄여서 남긴 책의 제목조차 잘못 알고 있을 만큼, 몸속에 장착되어 있는 허세는 버려지지가 않고. 쓸 만한 지식과 상식이 잘못 버려지는 부작용만 일어나는. 내가 쇼핑을 하지 않으면 패션 회사가 망하고 그 회사를 다니는 직원들이 망하고 그 직원들의 가족은 또 어쩌나 걱정이 들어, 그걸 핑계 삼아 아주 가끔 꼭 필요하다 싶은 옷들을 또다시 사다 집어넣는 나의 이 선택적 미니멀 라이프.

오늘도 나는 버릴 만한 물건을 찾아 집 안을 어슬렁거린다. 분명한 건, 내 손에 잡혀 있는 게 남편의 손목은 아닐 거라는 거다. ‘월든’이라는 호숫가에 혼자서 오두막 짓고 살 깜냥은 못 되니,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웰던’한 삶을 살자 하는 단순한 생각. 단순하게 산다는 게 꼭 물건 정리만은 아닌 거니까. 단순하게 생각하고 사람 관계도 가급적 단순하게 만들어가며. 에라 모르겠다. 키친타월도 다 떨어져가는데 다이소나 나가봐야겠다.

이현정
이화여자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드라마 작가로 활동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글쓰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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