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다 끝나는가? | 죽음은 윤회와 열반의 갈림길이다

죽으면 다 끝나는가?

오진탁
한림대학교 철학과 교수


죽음은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과학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죽으면 다 끝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죽음, 끝이 아니다”고 말하면, 과학적으로 증명해달라고 단호하게 요구한다. 하지만 죽음은 과학이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과학은 살아 있는 인간의 관점으로 실험하면서 형성해나가는 지식 체계이므로, 우리는 죽음에 과학으로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 예일대의 철학 교수, 셸리 케이건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다음같이 말한다. (A) “죽으면 다 끝난다”고 그는 반복해서 말한다. (B) “죽음을 모른다.” 죽으면 다 끝난다는 것이 그의 기본 입장이지만, 그는 또한 기이하게도(?) 죽음을 모른다고 여러 차례 솔직하게 고백한다. 뭔가 이상하다. 그는 죽음을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죽으면 다 끝난다고 호언장담하는 게 아닐까?

“죽으면 다 끝난다”와 “죽음을 모른다”는 서로 모순되므로, (A)와 (B) 중 어느 하나만 말해야 한다. 그는 (A) “죽으면 다 끝난다”는 말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는 (B) “죽음을 모른다”고 부지불식간에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셸리 케이건처럼 죽음을 모르면서, 죽으면 다 끝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히려 죽음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이런 현대적 상황에서 불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단지 경전 속에 있는 말만 반복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붓다는 방편, 중생의 근기와 시대 상황에 따른 응병여약(應病與藥, 병에 맞게 약을 준다)을 강조했으므로, 현대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해 분명하게 대응해야 한다.

불교의 8만 4,000가지 가르침은 다음같이 요약된다. (1) “현재의 삶에 집중하자.” (2) “윤회, 죽음은 끝이 아니다.” (1)의 경우, 붓다는 10가지 질문에 대해 침묵을 고수했다. 10가지 질문 중 사후 존재와 관련해 네 개의 질문이 나와 있을 정도로 여래의 죽음 이후 사후의 존재 문제에 관한 논의가 활발했다. 이에 대해 붓다는 무기(無記)의 침묵만 지켰을 뿐이다. 이런 질문에 골몰했던 말룬키아풋타는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 붓다에게 불만이었다. 이런 질문에 답을 주지 않으면 붓다를 떠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붓다는 독화살 비유를 말하면서 지금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라고 가르쳤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도 말룬키아풋타와 비슷한 불만을 가진 게 아닐까? 독화살 비유가 과학과 육체 중심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갈증을 충분히 풀어줄 수 있을까? 사람들은 왜 죽으면 다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죽음과 윤회를 체험하거나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으므로, 죽으면 다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대적 상황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죽으면 정말 다 끝나는지 여부에 대해 분명한 메시지가 요구된다.

불교는 윤회를 말하지만, 윤회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불자들도 많다. 윤회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뜻이다. 과거에 살았던 모습을 알아야 현재의 삶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고, 미래의 삶을 보다 잘 살 수 있다. 과거의 삶과 연결된 현재 우리의 삶은 죽는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니라 미래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현재 삶의 병이나 어려움이 과거 삶에 그 원인이 있으므로, 이곳에서 겪고 있는 삶의 의미를 크게 바꾸어놓는다. 지금 겪고 있는 고통에서부터 가족관계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이 새롭게 비추어진다. 이런 방식으로 윤회는 여기 지금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물질적·육체적 한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확장된 자기 정체성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보다 의연하게 수용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윤회를 잘못 오해할 수도 있다. (1)로 인해 죽으면 다 끝난다는 오해가 파생되듯이, (2) 역시 마찬가지다. 현생의 불운과 행운을 모두 전생으로 돌리면서, 행운은 독점하고 타인의 불행을 방관하게 될 수 있다. 윤회는 우리를 구속하는 올가미로 작용할 수도 있으므로, 현실의 불합리한 점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 또 과학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 윤회는 종교적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비난받기 쉽다. 여러 경로를 통해 알게 된 과거의 삶이 실제로 그의 전생인지 모두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윤회는 불교 인과응보의 다른 표현
그럼에도 윤회와 전생에 대한 인간의 관심과 갈증은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말보다 정확하고 냉정한 가르침이 어디 있을까. 행위의 과보를 그 삶에서 받지 않고 과보를 받는 시점이 아무리 멀어도, 그 행위의 결과가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점에서, 윤회는 불교 인과응보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붓다가 중생을 보면 현재 삶도 보이고 과거 삶도 읽고 미래 삶까지 함께 본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삶만 살고 있는 중생에게 전생을 말해주어도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 과거의 삶에 대해, 윤회에 대해, 여래의 사후 존재에 대해 붓다는 침묵을 지킨 게 아닐까? 붓다가 (1)에 초점을 맞춘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생사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훨씬 급하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죽음과 윤회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2)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결국 (1)에서 말하는 것처럼 현재의 삶에 충실하기 위함이다. 과거의 삶만 말하거나 미래의 삶만 상상하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지 못하면 뜬구름 잡는 격이기 때문이다.

(1) “현재의 삶에 집중하자”, (2) “윤회, 죽음은 끝이 아니다”,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1)의 경우, 현재의 삶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죽으면 끝나는지에 대해 침묵을 지켰을 뿐이다. (2)의 경우, 윤회를 통해 죽음이 끝이 아니므로, 현재의 삶에 충실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시대 상황과 중생의 근기를 고려해 (1)과 (2) 가운데 어느 한쪽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이고 다른 쪽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1)과 (2)를 통해, 바로 지금 이 삶에서, 끝없이 윤회하는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자는 메시지를 불교는 전하고 있다.

그런데 과학과 육체 중심의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셸리 케이건처럼 이 삶만 알고 있어서 죽으면 다 끝나고, 자살하면 고통도 끝난다는 오해가 폭넓게 확산되어 있다. 이런 오해가 많은 불행과 비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런 오해와 불행을 어떻게 해야 예방할 수 있을까?

현대인은 죽으면 다 끝나는 것으로 알고 있으므로, (2)를 통해 “죽음이 끝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전하고, (1)을 통해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는 가르침도 전해야 한다. (2) “죽는다고 끝이 아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현재의 삶을 보다 넓고, 훨씬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므로, (1) “현재의 삶에 초점을 맞춰 살 수 있게 된다.” 과학과 육체 중심의 현대 사회에서 이런 사실을, 어떻게 하면 보다 알기 쉽게, 한층 설득력 있게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오진탁
성균관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 철학과 교수, 동 생사학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저서로 『죽으면 다 끝나는가?』, 『자살 예방 해법은 있다』, 『죽음을 알면 삶이 바뀐다』 등이 있고, 『티베트의 지혜』 등의 번역서가 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