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내 안의 두려움을 지우는 작업

명상가 찰리
- 명상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전환해가는 길

사진 | 류성

도봉산 언저리에서 채취해서 말린 허브는 제법 깊고 짙은 향을 품고 있었다. 선재가 뜨거운 물을 여러 차례 부어도 싱그러운 허브향이 그윽하게 살아났다. 선재는 그 차를 즐겨 마셨다. 어쩌면 그것은 어딘지 모를 공허를 채우기 위한 작은 위안 같은 것일 수도 있으나 선재는 그러한 습관을 고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무엇으로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 것, 그래서 불안함과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는 건 자신에게 진짜 필요한 것,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했거나 찾지 못했다는 것일 테니. 어릴 때 별명이 ‘스와니’(인도의 구루)였을 만큼 영성에 관심이 많았고, 스무 살부터는 세계를 여행하며 구도의 여정에 올랐던 찰리는 확실히 그 방면에선 전문가였고 선배다웠다.

“첫 여행 때는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편도 티켓을 사서 무작정 떠났죠. 동남아, 아프리카, 유럽, 중동 등 정말 많은 곳을 돌아다녔어요. 목적은 확실했으니까 주로 여러 종교의 공동체를 찾아다녔죠. 크리스찬, 부디즘, 무슬림, 힌디즘… 정말 많은 종교단체에서 생활하면서 여러 수행자들을 만났어요.”

세상과 우리 안에 존재하는 화와 두려움
그 후로 명상가로 살아온 찰리는 아직도 여행을 즐겨 한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여행길에서 그가 보고 느끼는 것은 세상과 우리 안에 많은 화와 두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평화 시위를 하는 사람들 마음속에도 평화가 아닌, 분노와 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찰리는 이렇게 반문했다. 우리 자신부터 평화롭지 못한데 어떻게 세계 평화를 지킬 수 있나요?

“세상엔 300여 가지의 두려움이 있다고 해요. 지난번에도 얘기했듯 대개의 두려움은 학습과 상상에 의한 것이죠. 그래서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 못한 두려움이에요. 그런데 그 두려움은 과거 경험과 연결된 것이 많아요. 우리에겐 ‘의식하는 마음’이 있어서 과거의 모든 경험을 기억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에겐 무의식의 마음도 있죠.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 그곳에 저장되어 복원된다고 할까요. 가령 어떤 일이 닥치면, 무의식에 있는 기억의 저장고로 가서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한 정보를 끌어내는 거죠.”

선재는 오랜 과거에서부터 지금 이 순간에도 쉼 없이 쌓이고 쌓이는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내장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그 데이터베이스 안에 내장된 두려움의 칩도 떠올려보았다. 만일 그 칩을 없앤다면? 그 데이터베이스를 초기화한다면? 그러면 정말로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이 같은 상상으로까지 이어지고 보니 문제의 해결은 의외로 쉬워 보였다. 찰리는 인간이 겪는 두려움의 실체 중 하나가 상상에 의한 것이라고 했지만, 선재는 때론 상상이라는 것이 이렇게 요긴할 때도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다음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었다. 그 칩을 빼내려면, 그 데이터베이스를 지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선재가 이 같은 고민에 부딪쳤을 때 찰리가 명쾌한 얘기를 해주었다.

“선재의 생각이 맞아요. 그 데이터베이스를 지우게 되면 삶 속에서 느끼는 두려움이 점점 없어지게 되죠. 상상에 의해 자신이 만든 두려움도 줄어들기 시작하고요. 그 데이터베이스를 청소하는 작업이 ‘명상’이죠.”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찰리에게 명상은 자기 자신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고, 지고의 순수한 에너지와 연결을 맺는 것이다. 그 시간에는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서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우린 본래부터 영적인 존재지만, 끝없이 일밖에 모르고 달려가죠.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하나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자신의 영적인 여정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겁니다. 자기를 영혼으로서 경험하게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죠. 그런데 우린 그 사실을 잊어버렸고 그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엉뚱하게도 외부에서 사랑을 구하면서 방황하고 좌절하죠. 내면의 삶을 가꾸지 않으면 공허한 느낌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어요. 명상을 통해 영혼으로서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는 연습이 필요해요. 어렵지 않아요. 스스로 훈련하면 되죠.”

찰리는 그 훈련의 첫 단계가 내가 영혼이라는 것을 머리로 아는 노력이라고 했다. 그것을 확신하게 되면, 나머지 98%는 스스로 노력해서 경험해가는 것이다.

“실제로 저는 내가 영혼이라는 사실을 경험하는 것에 많은 노력과 공을 들이죠. 세계 어디를 여행하고 어디에 있더라도 명상을 거르지 않아요.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내가 영혼이라는 의식을 갖고 지고의 에너지와 연결하는 명상을 합니다. 그러면 정말이지 마음이 차분해지고 충만해짐을 느끼죠. 그 순간에는 어떤 것도 필요 없어요. 그저 완전한 충만감과 행복감을 느끼게 되죠. 그것이 가능합니다. 명상은 우리가 삶 속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투자예요. 제가 사는 호주에서는 거의 모든 국영 은행과 항공사 어디에서든 명상할 데가 있죠.”

찰리는 또 두려움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전환해가는 길, 그에 앞서 수많은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에 대해 알려주었다.

“우선 첫 번째는 우리 삶 속의 모든 것이 끝없이 변한다는 걸 이해하는 거죠. 이 사실 외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봐야 해요. 그리고 우리 인생이 기차여행과 같다는 걸 이해해야 해요. 기차를 타면 정차하는 역에서 내릴 사람은 내리고 탈 사람은 타잖아요. 다음 역에서도 마찬가지죠. 또 내가 내릴 역에 도착하면 나도 내려야 합니다. 이처럼 내 삶 속으로 사람들이 들어오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고, 또 부나 명예가 들어왔다가 떠나기도 하죠. 이런 삶의 법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내가 무엇에라도 애착하게 되면 그걸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동적으로 발생한다는 거예요. 실제로 우리가 가진 두려움을 잘 살펴보면,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간에 마음이 붙어 애착할 때라는 걸 알 수 있어요. 다시 말해 우리의 두려움은 영구하지 못한 일시적인 것에 매달릴 때 일어나죠. 지혜란 내게 허용되는 모든 것을 즐기고 향유는 하지만 그 어떤 것에도 매달리거나 집착하지 않죠. 그런데 이게 쉬울까요?”(웃음)

찰리의 웃음은 그것이 의외로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는 선재에게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세 번째 방법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런데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세 가지 자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에겐 세 종류의 자아가 있는데, 그중 두 가지는 우리에게 점점 더 많은 두려움을 갖게 하는 반면 한 가지는 삶 속에서 사랑이 늘어나게 해주죠. 우선 우리에겐 몸을 중심으로 형성해온 인격이 있어요. 그 자아를 저는 ‘열등감의 나’, ‘교만의 나’로 부르죠. 그런 나는 언제나 자신을 남들과 비교합니다. ‘내가 남들보다 낫다’, ‘내가 더 많이 안다’, ‘내가 옳다, 그런데 그걸 몰라’ 하고 얘기하는 거죠.(웃음) 그런 내가 나를 지배하면 과민해지고 쉽게 모욕감을 느끼기도 해요. ‘남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를 존중하지 않고 무례하게 대한다’라고 생각하죠. 말하자면 ‘교만의 나’ 이면에 감춰진 모습이 ‘열등감의 나’인 거예요. 그런 에고가 내면을 지배할 때는 두려움이 일어나죠. 행여 사람들이 자신감 없는 진짜 내 모습을 보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움이 일어나고, 남들에게 비치고 싶은 내 모습을 지키기 위해 압박감을 느끼게 되죠. 남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고 비판할까에 대한 두려움도 생기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마구 일어나기도 해요. 영적 법칙으로는 에고가 많으면 많을수록 두려움도 그만큼 커지죠.”

에고의 두 자아는 이외에도 많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희망이 없다고 느끼고, 자신이 아무것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고 느끼고, 가치가 없고 열등하다고 느끼면서 우울해한다.

“우울증을 심리학에선 어떤 꿈이나 이상이 실현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일어난다고 하는데, 영성에서는 달라요.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에고를 그 원인으로 보죠. 난 살아 있는데,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나를 잃어버린 느낌인 거예요. 그래서 내가 진정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죠. 이 자아가 영구적인 나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바로 세 번째 자아의 모습이죠.”

그 세 번째 자아를 찾는 것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찰리는 충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영혼으로서의 나를 경험하기 시작하면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돼요. 많은 교육을 받고 정보가 넘쳐나는 요즘 세상에선 똑똑해지기는 쉽지만 자신에 대해 깊은 사랑을 갖게 되기는 정말 어렵죠.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고 추앙받는 사람도 자기 내면에서는 ‘나는 가망 없다, 실패자다’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명상을 지도하는 분들 중에도 겉으로 보기엔 성공했고 존경을 받지만, 정작 내면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어요.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것도 삶을 두려움 없이 가볍게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죠.”

삶을 ‘가볍게’ 산다는 것. 무엇보다 그 말이 와 닿는 까닭을 선재는 알 것 같았다. 상상으로, 학습으로, 그리고 과거의 데이터로부터 만들어낸 그 많은 두려움을 그동안 얼마나 무겁게 짊어지고 살았던가. 그 짐을 벗어던지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해방감과 자유를 얻게 될 것인가. 그런 상상만으로도 벅찬 선재에게 찰리는 이렇게 귀띔했다. 사실 그 일부만 놓아버려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그러면서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선재에게 당부했다.

“사랑은 세 군데에서 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에게서 올 수 있고요, 가족이나 타인에게 올 수 있고, 또 신에게서 올 수도 있겠죠. 이 중 대부분의 사람이 가장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자신에게서 오는 사랑일 거예요. 자신을 사랑하기는커녕 어떤 사람은 아주 못살게 구박하죠. 대개의 사람은 가족이나 친구,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사회 속에서 사랑을 갈구하고 온 마음을 바쳐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우리 인간에겐 딜레마가 있지 않나요? 그 어떤 인간관계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 언젠가는 그 관계가 끊어질 때가 온다는 것이죠. 그 사실을 잊고 살다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그 관계를 잃어버리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하잖아요.”

그러한 딜레마에서 예외인 관계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찰리는 그것이 바로 자신과 맺은 사랑의 관계라고 했다.

“상상해보세요. 내가 내게 진실로 사랑을 줄 수 있다면? 그땐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을 줄 수 있게 되죠. 그런 사랑을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어디를 가든 내가 사랑을 퍼뜨리는 거 말이에요. 그렇게 된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 사랑을 다시 얻게 되는 경험을 할 겁니다.”

친절하고 현명한 명상가 찰리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선재에게 또 이렇게 속삭였다.

“이건 상상이 아니라 ‘리얼’이죠.”(웃음)

함영
‘생각 없이 글쓰기’와 ‘생각 없이 사랑하기’를 꿈꾸는 글쟁이다. 『빅이슈』 편집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밥맛이 극락이구나』, 『인연으로 밥을 짓다』, 『곰탕에 꽃 한 송이』, 『공양간 노란문이 열리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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