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허전할 때 만난 불교 | 나의 불교 이야기


아픈 환자를 부처로 보니 
진료 시간이 수행

이여민
내과 전문의


30대 중반에 불교 공부하기
환갑이 된 2022년은 나에게 뜻깊은 해였다. 괴로웠던 순간 힘이 되었던 『금강경』과 나의 만남을 쓴 책, 『대중지성, 금강경과 만나다』가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인연으로 ‘나의 불교 이야기’ 원고를 청탁받고 언제 불교와 만났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자 먼 기억 속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어릴 때 할머니를 따라 절에 가면, 경내 입구에서 만나는 4대 천왕의 부리부리한 눈이 나쁜 것들로부터 나를 지켜줄 것 같아 든든했고 대웅전 부처님의 온화한 얼굴과 향 냄새가 좋았다. 학교에 입학하고서는 공부와 취직, 결혼, 그리고 육아에 집중해 불교는 생활에서 점차 멀어져갔다. 그러다 30대 중반쯤, 의사로서의 전문성을 잘 쌓아가며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가끔 마음이 허전하고 뭔가 잃어버린 것 같은 시기였다. 그때 어머니가 나에게 미리 불교 공부하기를 강력히 권하셨다. 그래야 삶에서 예기치 못하게 닥쳐오는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다고. 돌이켜보니 불교의 인연은 할머니의 관세음보살 염불에서 시작해 다시금 불교 공부를 열어준 어머니의 권유로 이어져 있었다. 어머니 말씀대로 서른여덟 살에 사람들을 모아 『고요한 소리』라는 책으로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허전했던 38세에 만난 불교 공부는 나에게 삶의 활력을 주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진료실에서 환자만 만나다가 경치 좋은 산사에서 스님들을 뵙고 법문 듣는 순간은 환희였다. 새로운 삶의 지도를 알게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이 생활하던 싯다르타 왕자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노병사(老病死)의 괴로움을 보고 이를 해결하려고 출가했다는 사실에 나는 크게 감동했다. 지금의 세속적 행복이 노병사를 해결하지 못함을 알게 되었고 깨달은 부처님 삶이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연기법의 진리를 깨닫고 부처가 된 싯다르타 왕자는 ‘불사(不死)의 문이 열렸다’라고 하셨다. 항상 막연하게 무서워하던 죽음을 ‘불사(不死)’로 표현하는 불교 공부를 한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법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금방이라도 깨달을 것처럼 열렬하게 불교 공부를 시작한 지 6개월 뒤쯤, 삶의 폭풍이 몰아쳤다. 이때 인생 경전, 『금강경』을 28번 독송하며 5년간의 재판을 치렀다. 일상이 안정되자 ‘법등명 자등명(法燈明 自燈明), 법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를 기억하며 스승에게서 배운 공부와 삶이 일치하게 일상을 바꿔보기로 했다. 스승은 길을 알려주지만 직접 그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출근하기 전 2시간을 할애해 매일 고전을 읽고 글을 썼다. 진료하는 동안에는 매번 같은 문제로 방문하는 환자들에게 일상을 더욱 상세히 묻고 습관을 바꾸는 방법을 제시해보았다.

그러던 중 2016년 10월에 정토회 불교 명상에 참석했다. 4박 5일의 기간 동안 30분 좌선을 하루에 9시간 정도 반복적으로 하는데 처음 접한 명상에 다리가 너무 아파 얼굴이 화끈거리고 화가 났다. 도저히 더는 못 할 것 같았다. 게다가 내가 이렇게 앉아 있지도 못한다는 사실도 충격이었다. 묵언 중이라 질문지에 다리가 너무 아프다고 적어내면 그냥 호흡에 집중하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게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몰라 답답하기만 했다. 어찌어찌 명상이 끝나고 묵언을 풀자 함께 수행한 도반들이 모두 다리가 아팠다고 말했다. 나만 아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마음이 좀 진정이 되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부처님도 깨닫기 전 6년 고행을 통해 몸의 모든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과 항상 아픈 환자들, 생리통, 아토피와 두통으로 고생하는 딸들이 갑자기 생각났다. 생각해보니 나는 건강한 편이라 그동안 타인의 고통에 둔감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만했던 나를 참회하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되어 돌아오는 내내 펑펑 울었다. 이후 지금까지 호흡 명상을 꾸준히 하고 있다.

머무는 바 없는 자비로 이르는 길
명상과 더불어 도반들과 세미나를 통해 부처님 법을 계속 공부하는 중이다. ‘연기법’을 공부하면서 ‘나’는 무수한 인연의 집합체이며 지금 일어나는 일이 곧 실상이니 ‘좋고 싫음’에 치우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함을 알았다.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에서는 이해득실을 따지는 습관이 해가 되는 것을 배웠다. 사심을 버리고 공부하니 중생을 깨닫게 하려고 먼저 깨달아야 하는 ‘보리심(菩提心)’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 아침 명상하기 전 먼저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암송한다. ‘모든 존재가 행복과 행복의 원인을 갖게 되기를, 모든 존재가 고통과 고통의 원인에서 벗어나기를, 모든 존재가 고통 없음을 아는 기쁨과 떨어지지 않기를, 모든 존재가 애착과 증오 없는 평정심에 머무르기를.’ 그리고 수행이 끝나면 이 모든 공덕을 중생에게 회향한다. 이제는 수행해 빨리 깨닫고 싶다는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매일 아침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지금은 모든 중생이 부처라는 것을 믿는다. 환자를 아픈 부처로 보니 진료 시간이 나에게는 수행이다. 나 또한 부처라고 믿으니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배우는 마음에 진심이 더해졌다. 이렇게 앞으로도 『금강경』에서 배운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머무는 바 없는 자비로 이르는 길’을 계속 걸어가려고 한다.

이여민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내과 전문의 자격 취득 및 생리학 전공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내과 의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공부 공동체 ‘감이당’에서 동서양의 철학, 불교 경전 공부를 하고 있다. 저서에 『대중지성, 금강경과 만나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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