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수행
정세근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친애하는 B에게 :
B여, 나의 글을 잘 읽었다니 고맙소. 누군가 나의 글과 그 속의 흐름을 읽어준다는 것은 큰 힘이 되오.
대승불교의 여래장에 대한 나의 의견에 조심스러움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오. 그럼에도 그것이 자궁처럼 가능성이지 실체는 아니라는 생각에 동조해주어 다행이오. 실체화시키는 것은 ‘엄마, 아빠가 만나기도 전에 내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비유에 웃어주어 기쁘오.
맞소. 무자성과 불성은 양립 가능하오. 흔히 자성과 무자성을 같은 뜻으로 쓰는 것도 우리 불교의 현실이오. 그러나 무엇이 먼저냐고 묻는다면, 아니,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써야만 한다면 자성이 아니라 무자성(無自性)이라는 것이오. 반대되는 개념을 한데 쓰는 우리의 애매함은 떨쳐버려야 하오.
알다시피 무자성을 가리키는 니히스바브하바(niḥsvabhāva)의 ‘니히’는 니힐리즘의 니히, 곧 없음이지만, 우리의 전통에서 없음은 있음보다 시원적이고, 근본적이고, 포용적이라오. 넉넉한 없음, 받아주는 없음, 돌아갈 없음, 처음인 없음이라오. 그래서 불교의 진리인 공(空; Śūnyatā)도 처음에는 무(無)로 번역했었소.
시작부터 너무 딱딱한 것 같소. 그러나 처음을 잘못 잡으면 뒤돌아가려 해도 너무 멀어지기 때문에 하는 말이오.
B는 내가 젊은이들에게 너무 고민하거나 주저하지 말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을 기억할 것이오. ‘머뭇거리느라 허송세월하지 말고, 어느 길이든 가보라. 잘못된 길임을 알고 되돌아오는 것이 더 빠를 수 있다’는 말을. 내가 가지 말아야 할 길은 의외로 금방 느끼기 때문이오. 내가 되돌아갔을 때 머뭇거리는 사람은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을 것이고, 내가 숨을 돌이키고 다른 길로 떠났을 때도 그들은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을 것이라오. 그러나 자성의 길이 곧 무자성의 길임을 모를 때, 또한, 불성을 깨닫는다는 것이 무자성을 깨닫는 것임을 모를 때 우리의 향방은 엉망이 되고 만다오. 그러니까 표지판에 ‘불교’라고 써놓고 막상 도착지는 ‘브라만교’나 ‘힌두교’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오. 서울이면 서울로, 부산이면 부산으로 가야 하오.
깨달음과 수행의 문제도 마찬가지라오. 그것이 이른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문제지요. 자성과 무자성이 형식상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실제적 의미에서는 같이 쓰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돈오와 점수도 대립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오. 말부터 풀어봅시다.
돈오는 갑자기 찾아오는 깨달음을 가리키오. 여기서 ‘돈’은 ‘오’를 부사적으로 꾸미지요. ‘갑자기’, ‘갑작스레’라는 뜻이오. ‘갑작스러운’이라는 형용사로 쓰더라도 뜻은 마찬가지라오. 깨달음은 갑자기 온다는 것이오. 그런데 깨달음이 천천히 온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형용모순인 것을 느끼시오?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치듯 그것은 발견이고 급전이고 전도(顚倒)라오. 없었는데 찾았다든가, 천천히 가다가 마구 굴러간다든가, 위아래가 바뀌었든가 하는 것이오.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라든가, 시동이 안 걸리다 갑자기 걸리든가, 겉은 하얀데 속이 검다든가 하는 ‘알아차림’의 이야기라오.
알아차림은 당연히 갑작스러운 것이지 오랫동안 벌어지는 것일 수 없소. 알아차렸으면 이미 과거가 되어, 그냥 ‘안다’는 것으로 바뀌오. 그러니까 알아차림은 알지 못함과 앎 사이의 짧은 시간인 것이오. 따라서 돈오는 순식간, 그러니까 비명을 지르는 돌차간(咄嗟間)의 것일 수밖에 없소. ‘깨달음’에 붙는 ‘갑자기’라는 말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군더더기 같은 말(췌언贅言)이라는 것이오.
점수도 마찬가지요. 점수의 ‘점’은 점차(漸次)를, ‘수’는 수행(修行)을 가리키는데, 물어봅시다. 수양이 갑자기 될 수 있소? 버릇이 쉽게 사라지오? 닦음이 한칼에 이루어지오? 칼을 만들려고 해도 담금질을 수없이 해야 하는 것이고, 이미 이루어진 칼이라도 숫돌에 여러 번 문대야 날이 서는 것인데, 어찌 닦음이 한칼에 이루어질 수 있겠소?
한국의 선불교를 조계종이라는 이름으로 정립한 지눌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요. 돈오점수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오. 깨우침을 선종(禪宗)에, 경전 공부를 교종(敎宗)에 할당하는 구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오. 생각 없는 공부가 어딨고, 공부 없는 생각이 어딨소. 둘은 늘 같이 가야 하는 것이오.
공자의 말을 빌리면 ‘배워도 생각이 없으면 헛수고(망罔)요, 배우지 않고 생각만 해도 위험(태殆)하다(Learning without thought is labor lost; thought without learning is perilous.)’는 것이요, 칸트의 말을 빌리면 ‘내용(경험)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이성)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는 것이오.
문제가 된 것은 바로 ‘돈오돈수(頓悟頓修)’라는 말이오. 갑작스러운 수양이 가능하다니 그것이 도대체 뭔 소리인지 헷갈리게 된 것이오. 나요? 전차가 대학의 교문을 막던 1980년대 시절에 언론에서 떠드는 그 말을 듣고 잔뜩 욕을 한 나요. “그래, 절간을 탱크로 막아봐라. 그딴 소리가 나오나!” 큰스님의 깊은 뜻을 모르고 한 말이오만, 스무 살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분노였소.
사실 돈오돈수라는 말은 곳곳에서 나오오. 돈오점수 이론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당나라 혜능(738~713)의 『육조단경』부터, 습(習; 습관)을 없애려면 점수가 필요하다는 고려 지눌(1158~1210)의 『수심결』에 이르기까지 돈오돈수라는 말은 툭툭 튀어나오지요. 그런데 이때 돈오돈수는 돈오점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돈오점수를 격려하려는 방편의 말씀이지 그 자체가 독립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라오. 그런데 갑자기 돈오돈수를 침소봉대하는 것은 선사의 말을 잘못 이해하는 것을 넘어 왜곡하는 것으로 보이오.
그래서 많은 학자가 지눌의 말에서도 깨달음 이후의 점수에 더 무게를 두는 것이라오. 그것이 곧 한 생각으로(일념一念) 빛을 돌이켜(회광回光) 나를 돌이켜보는(반조返照) 수양이라오. ‘돌이킨다’거나 ‘돌이켜본다’는 것은 깨우침에 이어지는 일이라오. ‘생각을 하나로 모은다’는 것조차 깨달음을 잊지 않고자 하는 닦음의 행위인 것이오. 그래서 수양은 매일 부단하게 쉬지 않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오.
이른바 선가에서 말하는 ‘높은 꼭대기에서 한 걸음 더(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라는 것은 멈춘 엔진에 시동을 걸라는 것이지 급발진하라는 것은 아니잖소. 모두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배기량의 차이는 있더라도 엔진 하나씩은 챙기고 있다는 것이 아닐 수 없소. 시동이 걸린 다음에 이제 남는 것은 변속, 변화, 변신의 과정이라오.
B여, 날아라! 우리의 태권V!
정세근
국립대만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사)한국철학회 제53대 회장, 국가미래교육을 위한 전국철학회연석회 의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노장철학과 현대사상』, 『윤회와 반윤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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