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가?

혜담 스님
불광법회 선덕


기도란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어떤 소망을 이루거나 혹은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제각기 여러 가지 원이 있다. 학교에 가는 문제, 사업에 관한 것, 집안의 화합, 마음의 평화, 건강 등등의 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나름대로 방법을 선택할 것이고 노력도 할 것이다. 때로는 어떤 절대자를 가정해놓고 그 절대자의 은총에 기대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무당에게 물어서 떡을 차려놓고 엎드려 절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소망을 이루기 위해 취하는 생각이나 행위를 ‘기도(祈禱)’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불자는 기도하면서 ‘부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를 돌아봐주십시오’ 이렇게 빌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의 기도가 아니다. 비록 기도란 말이 빌 기(祈) 빌 도(禱)의 합성어지만, 불자(佛子)의 기도(祈禱)는 그렇지 않다. 불교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법성 진리의 힘을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생명에 넘치고 있고, 흐르고 있는 부처님의 진리 광명을 언제나 마음에 두는 행동이 기도다. ‘부처님의 무한대의 위신력이 내 생명으로서 넘쳐나고 있으며 그것이 지금 나의 현실이다’라는 사실을 깊이 믿는 것이 불교의 기도다.

따라서 불교에서 기도는 부처님의 크신 위신력이 나와 함께 있어서 나를 통해 부처님의 크신 위신력이 넘쳐나도록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라는 관념을 없애고, 그 속에서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믿고 부처님께 완전히 다 맡기고 일심으로 염불하고 염송하는 것이 불교의 기도인 것이다. 자기의 생명 위에 너울치고 있는 부처님의 무한 공덕, 온 이웃, 온 세계에 충만한 부처님의 자비, 온 생명 구석구석 넘쳐나는 부처님의 지혜 위신력, 그것을 생각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온몸 자체로 보는 기도다.

두 종류의 기도
기도라는 어휘가 ‘빈다’라는 의미라고 했는데, 같은 기도라는 말을 쓴다고 해도 창조주나 절대자를 설정해두고, 그 절대자를 향해서 소망을 비는 종교에서의 기도 형태와 절대자가 없는 불교의 입장은 다르다. 불교의 기도는 부처님께서 이미 주신 완전한 진리가 나의 생활과 몸과 마음에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기도가 바로 수행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는 깨닫는 것인데 무슨 기도가 수행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불교의 기도는 부처님께서 우리가 원하기 전에 완전한 것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오직 정진해서 부처님께서 주신 밝은 은혜의 햇살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이 까닭에 기도 수행은 참다운 삶의 실현이며, 나의 영원한 참생명인 부처님 무량 공덕 생명과 하나가 되는 길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 한량없는 공덕과 복덕의 문을 여는 창조적인 행이 기도다.

바른 믿음, 바른 기도에 의해서 사태는 반드시 바뀌고 기도는 성취된다. 이것은 결코 부처님이 제시한 논리가 아니다.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니다. 반야의 큰 지혜가 밝혀낸 인간과 우주와 법성 진리의 원래 모습인 것이다. 온 생명의 근원적 모습이다. 그래서 법성(法性)이라고 하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진리 본연의 참모습을 끊임없이 그 가슴속에서 지켜보고 그 실현을 추구하는 사람이 불교에서의 기도하는 사람이다.

불교 기도의 원리와 가피(加被)
불교에서 생각할 때, 기도야말로 완전한 삶을 사는 생명의 율동이며 생명에 깃든 자유와 평화, 환희, 지혜와 자비, 무한 공덕의 부처님 무량 광명을 바르게 내어 쓰는, 한마디로 부처님께서 주시는 일체 공덕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기도의 기술(The art of Life)을 바르게 쓸 줄 알아야 한다. 무엇이 기도의 기술일까? 첫째는 큰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신일자(信一字)가 바르게 되었을 때 온갖 행이 나오고 지혜가 이루어지고,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마지막 가는 진리를 성취해서 성불하게 되는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은 『화엄경』의 핵심 사상이다. 자기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이 나타나서 자신의 상황과 환경이 된다는 말이다. 때문에 마음이 행복을 이룬다는 이 말은 불행한 것을 마음을 고쳐먹어 행복한 것처럼 적당히 회피한다는 말이 아니다. 마음을 바꾸면 환경이 바뀌고 행복한 마음이 행복을 창조한다는 뜻이다. 완전한 부처님의 법은 우리가 마음을 바꾸고 그 마음을 씀으로써, 청정한 부처님이 주신 본래의 진리 청정을 나타내어 진리 청정 공덕을 우리의 현실 생활 가운데 갖다놓는 것이다. 범부의 국토 위에 성인의 국토인 불국토를 이루는 것이고, 우리의 생활을 끊임없이 변혁해서 불국토로 만들어가는 것도 이와 같이 바꾸는 것이다. 이를 일체유심소작(一切唯心所作), ‘일체는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라 말하기도 하고, 혹은 일체유심소현(一切唯心所顯), ‘일체는 오직 마음이 나타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대두되는 문제가 이렇게 중요한 마음(心)이란 것이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이에 답해서 『반야심경』은 “이 모든 법은 공상이어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라고 설하고 있다. 일체 모든 것의 본래 형상은 텅 빈 상태인데, 그 성질은 영원하고 청정하며 원만구족(圓滿具足=모든 것을 모자람 없이 다 갖추고 있음)하다는 설명이다. 다만 반야불교에서는 마음을 이렇게 공(空)이라고 표현하지만, 유식(唯識)불교에서는 마음을 의식(意識)이라고 다르게 말하고 있다.

이렇게 마음(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이것이 물질적 현상을 현현(顯現)한다. 때문에 기도란 『반야심경』과 『화엄경』의 법문을 믿고 자신의 마음=의식에 집중해 현실에 구현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부처님의 가피’라는 말이 현실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 가피력에는 현훈가피(顯熏加被)와 보이지 않는 명훈가피(冥熏加被)가 있다. 현훈가피란 금시발복이니 즉시 성취니 하는 경우고, 명훈가피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는 평화스러움과 기쁨을 받게 되는, 즉 보이지 않는 가피의 경우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기쁨을 주시고 성취를 주시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 속에 진리를 품고 태어났다. 한량없는 지혜와 덕스러움과 창조의 힘을 지니고 있다. 부처님은 이를 가리켜 만인은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진리인 자신, 무한의 창조력을 가진 자신에 눈떠야 한다. 그리고 이 진리가 부처님의 것이며 ‘불성이 곧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본성 안에서는 부처님과 같은 생명이라는 것이다. 너도 나도 삼라만상도 모두가 부처라는 혁명적인 선언이 불설(佛說)인 것이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이라는 말이다. 문제는 이 사실을 확실하게 믿기 위해서는 공과 의식을 보아야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 공(空)과 의식(意識)을 보기 위한 수행이 있어야 하고, 그럴 때 우리 삶은 쉬워지는 것이다.

혜담 스님
부산 금정산 범어사에서 광덕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승가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북쿄대(佛敎大)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선우도량 공동대표, 조계종 총무원 호법부장·재심호계위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사 주지를 역임했다. 현재는 불광법회 선덕, 각화사 주지로 있다. 역저서로 『반야경의 신앙』, 『고따마 붓다의 정관명상』, 『진리란 무엇인가』, 『반야불교신행론』, 『한강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셔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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