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츠오부시로
국물을 낸 우동보다
맛나고 따뜻한
공양간 풍경
교토에서 두 시간 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바마 시에는 30여 개의 사찰이 있다. 그중 산 밑 끝자락에 있는 부코쿠지(불국사)는 1500년대에 지어진 선종(禪宗) 사찰이다. 이 절은 가미가제 조종사 출신인 담현 노스님이 직접 참선을 지도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작은 암자 정도에 지나지 않는 가난한 절에는, 해제 기간에도 노스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외국인들이 머물러 있었다.
동양 문화를 전공하는 미국인 대학원생 폴을 비롯해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배낭여행 중인 대만인 아가씨 레이, 세심하면서도 활달한 여장부인 이스라엘 출신의 노처녀 루스, 그리고 매년 부코쿠지에서 방학을 보낸다는 미국인 교수 존과 유럽에서 온 중년의 처사도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단연 도겐 스님이다. 50대 초중반쯤 돼 보이는 그녀는 미국인으로 일본에서 출가한 비구니 스님이다.
선방 앞 의자에 앉아 할 일 없는 망상을 피우던 내게 도겐 스님이 다가와 먼저 합장한다. 환한 미소로 환영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모습이 눈부시도록 밝고 맑다. 예불을 올릴 때도 공양할 때도 조신한 걸음걸이로 경내를 돌 때도 심지어 폴과 뒷간에서 똥오줌을 퍼 날라 텃밭에 거름을 줄때도 그러하다.
잠시 잠깐 스치는 바람 같은 행복이 아니라 고요하고 평온하고 잔잔하게 머물러 있는 행복…. 견고하고 온전하게 느껴지는 그것은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린 후에야 적적하고 은밀하게 찾아오는 환희심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햇살처럼 빛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어림짐작해본다.
그녀는 다만, 오래전부터 선(禪)에 관심이 많았고 스님이 되고 싶어 비구니를 인정하는 나라인 일본에서 출가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도겐 스님만큼이나 부코쿠지와 인연이 깊은 외국인은 이탈리아에서 온 마리오다. 주방장 출신인 그는 여러 나라를 여행하던 중에 우연찮게 들른 부코쿠지에서 장기 체류 중이다. 여느 수행자들이 그러하듯 마리오는 절에 머무는 동안 참선을 배우며 나름의 밥값을 하고 있다. 그의 밥값은 당연 ‘요리’다. 살림 도구와 식재료만 봐도 저절로 손이 움직여지는 까닭에, 부코쿠지에 도착한 첫날부터 그는 공양간 도우미를 자청했다고 한다. 그렇게 눌러앉은 시간이 어느덧 일 년.
국적을 초월해 화합과 정성으로 지은 이들의 밥은 담백하고 건강하다. 죽이나 잡곡밥에 된장국, 매실장아찌, 절인 무를 기본으로 채소요리 정도가 전부인 간소한 식단이 이곳에서는 성찬이다. 수행자에게 있어 밥은 그저 수행을 위해 섭취하는 약인 까닭에,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절에서 먹는 밥맛과 의미는 남다르다. 하지만 초보 수행자에게는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식사 전 올리는 기도 의식과 음식을 나누는 시간은 오래 걸리는데 반해 밥은 거의 5분 안에 해치워야 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그보다 고역은 공양 시간 내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이다. 발우가 4개가 아닌 3개를 사용하고 그 크기가 작은 것도 한국의 절과는 다르다. 배고픈 아귀들의 몫으로 쌀알 몇 개를 옆에 준비해두는 것도 흥미롭다. 그 외에 공양 순서나 앉은 자리에서 설거지까지 끝내고, 단무지나 매실장아찌를 한 조각 남겨두었다 발우를 닦는 것은 우리와 비슷하다.
공양이 끝나고 공양간 스님들이 요리할 때 사용한 그릇과 도구들을 설거지하는 사이, 다른 수행자들은 남은 음식을 나르고 밥상을 접고 밥 먹은 자리를 깨끗이 청소하며 뒷정리를 한다. 그런 후 공양간 한쪽에 모여 설거지된 세간들을 마른행주로 닦고 찬장에 차곡차곡 정리한다.
가미가제 특공대원이 죽음 대신 얻은 삶에서 깨달은 진리
부코쿠지의 일정은 예불과 공양, 울력, 인터뷰 시간을 제외하고는 참선을 한다. 새벽 4시부터 시작되는 참선은 40분 정진하고 20분은 각자 경행이나 티타임을 가지며 휴식을 취하는 식이다. 참선방은 먼지 한 톨의 일어남도 선명하게 드러날 듯 정갈하고 고요하다. 공양 때와 마찬가지로 선방에서도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예법이 있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좌복에 앉을 때다. 처음부터 정면을 바라보고 앉는 것이 아니라, 일단 엉덩이를 뒤로하고 앉은 다음 몸을 180도로 빙그르 돌려 정면을 향한다.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은 앉는 방법부터 시범을 보인 후 복부 아래쪽을 가리키며 “하트(heart)”라고 한다. 그곳에 마음을 두고 의식을 집중시키라는 얘기다.
이튿날 오후 참선 시간에는 지도 스님이 법당 뒤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인터뷰 시간이었다. 공부한 게 있어야 인터뷰할 텐데 내심 걱정이 따랐다. 다소 비밀스럽고 신비스럽게 느껴지는 방 앞쪽에 노스님 한 분이 앉아 계셨다. 그가 바로 담현 노스님이었다.
“어쿠, 어째 그리 가부좌를 잘하지?”
노스님의 말투는 무척이나 친근하고 자상해 꼭 이웃집 할아버지 같다. 그래서인지 일본어를 몰라도 그가 하는 말의 뜻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허물없이 인사를 건넨 노스님은 가부좌가 잘되지 않는 친구를 재밌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힘들면 다리 한쪽을 반대편에 슬쩍 얹어만 놓게”라며 웃으신다. 노스님의 인자하신 미소와 다정다감한 말투와 때때로 섞이는 개구쟁이 같은 웃음소리가 세파에 거칠어졌던 마음을 성난 아이를 달래듯 살살 어루만진다.
“너와 내가 각기 다른 둘인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네가 기쁘면 내가 기쁘고, 네가 아프면 내가 아프고… 실상은 그런 것이지. 우리는 그렇게 하나다. 모든 것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지….”
노스님은 일본말을 모르는 우리를 배려해 간간이 쉬운 영어를 구사하며 말씀을 이어갔다.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여담으로 부코쿠지에 오기 전부터 궁금해했던 것에 대해 물어보았다. 노스님은 당신의 전직과 관련된 질문에 흔쾌히 전직과 관련된 오래전 사연을 들려주었다. 그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18세 무렵에 가미가제 특공대원이 되었고, 생애 최후의 술잔을 비우고 막 출격하려던 찰나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산 자의 고통은 죽은 자의 고통만큼이나 컸다. “세상에! 이건 말도 안 돼!!”라고 울부짖으며 통곡하다 몇 차례 기절을 했고, 그 후 불가에 입문해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함께 훈련받은 동료들은 이미 하늘나라로 가버렸는데 혼자 살아남았으니, 죽은 사람도 고통스러웠겠지만 살아남은 자의 고통도 어지간한 것이 아니었지. 차라리 그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면 행복할 것 같았지….”
죽음도 불사했던 이가 두려울 게 무엇이었으랴.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가리키고 당신 자신과 친구와 나를 가리키며 누누이 강조한 노스님의 가르침. 다름 아닌 “원(One)”이었다. 죽음 직전에 던져진 삶 속에서 평생을 치열하게 수행한 뒤 얻은 깨달음을 그는 아무런 대가 없이 너무나 쉽게 일러주었다.
글·사진|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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