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시간 찰나의 시간

시간의 흐름은 느리게 빠르게 조절할 수 있을까?

불교의 시간

윤희조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불교의 시간은 무상의 시간이다.
시간의 방향은 연기의 방향이다.
시간의 순서는 식의 순서이다.

무상의 시간
불교는 찰나의 시간부터 겁의 시간까지를 다룬다. 겁의 시간은 우주의 팽창과 수축에서 볼 수 있다. 경전을 보면 우주의 팽창과 수축은 빛으로 된 천신인 광음천의 수명인 8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겁은 가로, 세로, 높이가 1요자나(yojana), 즉 11km인 정육면체의 바위를 100년에 한 번씩 비단 옷자락으로 스치고 지나가서 그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라고 비유로만 설명한다.

와셋타여, 참으로 긴 세월이 지난 그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이 팽창하는 그런 시기가 있다. 세상이 팽창할 때 대부분의 중생들은 수명을 다하고 공덕이 다하여 광음천의 무리에서 떨어져서 이곳 [인간계]로 오게 된다. 그들은 여기서도 역시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을 음식으로 삼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천상에 머물며 길고 오랜 세월 살게 된다.1)

겁(劫, kalpa, kappa)은 신들의 수명과 비교해서 보아야 그 시간을 짐작할 수 있다. 신들의 수명은 욕계, 색계, 무색계의 어떠한 단계에 있는지에 따라서 차이가 난다. 천신들의 시각은 각각 일 년의 길이도 차이가 있고, 하루의 길이도 차이가 있다.

욕계(欲界)의 천신 가운데 가장 수명이 긴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신들은 인간의 연수로 92억1,600만 년의 수명을 가지고 있다. 타화자재천의 하루는 인간의 1,600년에 해당하므로, 타화자재천의 관점에서 보면 붓다는 어제 태어난 것이 된다.

타화자재천 다음으로 수명이 긴 색계(色界)의 천신인 범중천(梵衆天)의 수명은 3분의 1겁이다. 여기에서 단계가 올라갈수록 수명이 두 배 또는 그 이상으로 늘어난다. 가장 수명이 긴 비상비비상처의 천신들은 8만4,000겁을 산다고 한다.2)

수명이 두 배씩 늘어난다고 가정하면, 타화자재천의 수명은 6분의 1겁이 된다. 92억1,600만 년이 6분의 1겁이므로 1겁은 최소 552억9,600만 년이 된다. 100년에 한 번씩 옷깃을 스치므로, 5억5,200만 정도 비단 옷자락이 스치면 그 바위가 닳아 없어진다는 것이다. 우주의 팽창과 수축에는 8겁 이상의 시간이 걸리므로 4,423억6,800만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찰나는 눈을 한 번 깜박이는 시간인 0.1초의 10분의 1 정도인 0.01333…초의 시간을 말한다. 이는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3) 부처님은 아마도 무상(無常)을 표현하기 위해 이렇게 짧은 시간을 언급했을 것이다. 어떠한 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순간이라도 고정되어 있지 않은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 붓다는 가능한 한 가장 짧은 순간을 표현하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불교는 이처럼 ‘영원’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긴 시간과 ‘순간’이라는 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짧은 시간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서 아무리 길다고 할지라도 영원이 아닌 무상한 시간을 말하고, 아무리 짧다고 할지라도 고정할 수 없는 무상한 시간을 말한다. 천신 가운데 어떤 천신은 자신의 수명이 워낙 길다 보니 영원히 산다고 착각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유한한 시간을 가진다. 시간은 영원이 아니라 무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찰나’, ‘지금 이 순간’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무상을 드러내려고 할지라도 이러한 표현이 언표되는 순간 찰나는 지나가고 이 순간은 다음 순간이 된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고 할지라도 무상을 드러내기에 시간의 표현은 여전히 개념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시간을 지칭하는 아침, 저녁, 달, 년과 같은 시간은 개념으로만 존재한다.4) 나아가 ‘지금 이 순간’, ‘찰나’마저도 개념으로 존재한다. 생멸 자체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언어의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결국 겁이라는 영원의 시간도, 찰나라는 순간의 시간도 모두 무상의 시간으로 수렴된다.

연기의 시간, 인식의 시간
불교에서 운동은 존재, 즉 담마(dhammas)의 본성이다. 담마의 본성이 찰나생멸이기 때문에 담마와 운동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운동을 불교에서는 연기(緣起)로 표현한다. 모든 존재가 연기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모든 존재는 운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의 존재론인 담마와 운동론인 연기는 외연이 동일하다. 담마가 모든 존재의 영역에 해당되는 만큼 연기도 그만큼의 범위를 가진다. 연기를 보는 것이 담마를 보는 것이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5) 연기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성립하는 법칙이다. 이러한 운동에 의해서 시간이 드러난다. 시간과 운동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서양 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간을 ‘운동의 수’라고 정의한 것도6) 시간과 운동의 밀접한 관계를 간파했기 때문일 것이다.

운동의 방향성, 즉 연기의 방향은 다양하게 나아간다. 단선적인 방향이 아니다. 원인과 결과라는 관점에서는 원인에서 결과로 나아가는 방향을 가지지만, 원인에서 결과로 나아가는 방향성이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고, 현재가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단선적인 방향성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고, 현재의 생각이 과거에 영향을 끼친다. 이는 현재의 시간에서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식(識)에 의해서 떠오르는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일반적인 시간적 순서가 아닐 수 있다. 과거, 미래는 현재의 식(識) 안에서만 운동하기 때문에 항상 현재에서 보는 과거, 현재에서 보는 미래이다. 과거 자체, 미래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방향성은 다선적이고, 상호적이고, 중층적이다. 결국 시간의 방향성은 연기의 방향성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담마와 연기가 가장 넓은 범주인 존재론에 해당한다면, 이러한 존재를 인식하는 식(識)은 존재론으로부터 파생되는 범주인 인식론에 해당한다. 존재론에서 출발해서 인식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인식론에서 인식의 주체는 다양하다. 인간이 인식의 주체인 경우에는 운동의 수가 100년 정도인 생애를 살고, 하루의 길이가 24시간인 운동을 한다. 만약 인식의 주체가 천신이라면 운동의 수의 길이가 엄청 늘어난다. 시간의 길이는 식(識)에 의존한다. 이러한 시간의 장단은 인식 주체에 달려 있다. 인식 주체에 따라서 시간을 정하는 길이가 달라지기 때문에 아침, 하루, 한 달, 일 년 등은 개념적으로 정해진 것이 된다. 시간을 인식 주체의 개념에 따라서 구획하는 것은 더 이상 실재가 아니다. ‘찰나생멸’이라는 용어로 밖에 표현할 수 없지만, 표현하기 이전의 매 순간 변화 자체가 실재(reality)의 특징이다. 시간은 표현하고자 하면 개념이 될 수밖에 없지만, 생멸 자체는 실재이다. 시간의 순서는 삼세의 세(世)의 순서라기보다는 식(識)의 순서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시간이라는 용어보다는 생멸이라는 용어가 오히려 적합해 보인다. 생멸이라는 용어는 운동성과 시간성을 함께 표현하면서 움직이는 실재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시간, 공간이라는 용어는 ‘간(間)’이 지속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반면, 생멸에는 담마의 특징인 운동만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생멸’이라는 용어도 여전히 생멸하는 실재를 가리키는 도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시간은 무상의 시간이고, 연기의 시간이고, 식의 시간이고, 생멸의 시간이다.

1) D27 「세기경」, 『디가니까야 3』, 각묵 스님 옮김(2005) pp.161~162
2) 『아비담마 길라잡이 1』, 대림 스님·각묵 스님 옮김(2002) pp.462~489
3)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제136권
4) 『아비담마 길라잡이 2』, 대림 스님·각묵 스님 옮김(2002) p.259
5) M28 「코끼리 발자국 비유의 긴 경」, 『맛지마니까야 1』, 대림 스님 옮김(2014), p.683. y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yo dhammaṃ passati s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īti6 웅거, 위의 책, p.362~363
6) Phys. Ⅳ 11, 219b

윤희조
서울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불교대학원대 불교학과 석,박사과정을 졸업했다. 현재 서울불교대학원대 불교학과 교수로 있다. 『불교심리학연구』, 『불교심리학사전』 등의 역저서와 불교 상담 관련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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