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발달사 - 불교는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이어져오고 있나
인도 불교 (1)
최경아
동국대학교 다르마칼리지 강사
인도 불교는 한국 불교, 중국 불교 등과 구분되는 불교로서,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가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 전 세계로 전파될 수 있었던 요인과 특징, 그리고 그 전개와 추후 불교문화 사상에 미친 영향 등을 살펴본다.
불교는 기원전 5세기 갠지스강 유역에서 수행했던 사문 고타마로부터 시작되었으며, 13세기경 인도 본토에서는 사실상 쇠멸해버린 종교이다. 20세기에 이르러 부흥의 시도가 있었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불교가 아니며, 더더욱 인도 밖으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인도 불교라는 호칭은 세계 불교라는 바탕이 전제된 가운데 성립된다. 불교의 세계화는 수행을 통한 개인의 완전한 자유와 윤리적 완성을 추구했던 초기의 불교가 생업에 종사하는 일반 대중에게도 접근 가능한 종교로 체질 개선이 이루어진 시점과 맥을 같이한다. 더 이상 합송으로 불법이 전승될 수 없었던 시점, 문자화나 번역이 필요했던 시점에서부터 인도 불교가 세계 종교사의 주역으로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다.
스리랑카로의 전승은 사실상 최초의 성공적인 불교의 세계화로 기원전 3세기 아소카왕의 야심 찬 전도사 파견에서 시작된다. 그 후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북아 일대로 불교가 전파된다. 붓다가 입멸한 후에 불법에 대한 다양한 이견과 철학적 논의가 심화되었고, 계율에 대해서도 해석과 입장이 달라지면서 부파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 무렵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출현하게 되고 중앙아시아를 통해 설일체유부 등의 부파불교와 더불어 대승불교가 중국에 전파되기 시작한다. 스리랑카 전승의 남방 상좌부가 단일 전통의 삼장(경, 율, 론)을 보유한 것과 달리, 중국에 전파된 북전의 경우 다양한 부파 소속이다. 초기 불전에 해당하는 한역 아함(阿含)은 여러 다른 번역가에 의해 번역된 경들을 편집한 것으로, 각 경의 번역 시기에도 상당한 편차가 있다. 유사한 경명과 내용에도 불구하고 남방 상좌부의 경장인 니까야와 일치하지 않는다. 부처님 최초의 설법인 『초전 법륜경(Dhammacakkapavattana)』만 보아도 상응하는 경이 중앙아시아의 파르티아 출신 번역가 안세고가 기원전 150년 무렵에 한역한 『전법륜경』이 있고, 의정의 또 다른 한역은 7세기에 해당되는데 그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렇듯 큰 편차가 있는 경전을 통해 부처님의 원음을 찾아내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혹자는 그래서 아소카왕 당시에 전파된 것이 확실시되는 남방 상좌부 전통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지만, 현재 우리가 접하는 니까야는 5세기경에 인도에서 건너온 붓다고사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최초기 한역 경전에 비해 이른 것도 아니며, 이 또한 부파의 산물이다. 현재 우리에게 남겨진 거의 모든 문서화된 경, 율, 론은 부파와 종파의 산물이다. 오리지널 불교를 찾아야 한다면 기존과는 다른 연구 방법을 채택해야 할 것이다.
고타마 붓다 당시의 인도
힌두교와 달리 불교는 엄연히 시조가 있다. 역사적 인물인 고타마 붓다이다. 붓다가 없었다면 불교도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불교 발생기의 배경을 정리해본다.
생태환경적 요인: 인도는 열대몬순 기후군에 속한다. 쉽게 말하면 건기와 우기가 교차하는 기후로 일 년의 3~5개월은 우기에 해당하고 나머지는 건기이다. 우기에는 거의 매일 비가 오고 건기에는 비 한 방울 오지 않는다. 섭씨 40℃를 웃도는 기온에도 불구하고 큰 나무 밑은 놀랍도록 선선하다. 인도에서 명상 문화가 발달한 배경에는 이러한 기후 조건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풍부한 강수량과 일조량으로 인해 우리처럼 농사에 전념하지 않아도 대기근이 있지 않는 한 굶어 죽을 일도 추위도 없다. 울창한 나무 밑에서 명상하고 있는 요기의 모습은 인도의 자연환경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친숙한 광경이다. 내 집 앞마당이 거북이 등처럼 메말라 갈라지다 3~4개월 후엔 울창한 수림으로 바뀌고, 다시 메말라가는 것을 보는 주기가 다른 지역에 비해 짧고 극명하다. 생로병사 영고성쇠의 과정을 한 나무 밑에 앉아 관조할 수 있는 특화된 조건을 자연환경이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문화적 요인: 기원전 6세기 무렵 인도는 농경 문화의 정착과 도시의 형성, 자산가의 등장으로 드디어 절대자의 힘에 기죽지 않고 인간이 자신을 성찰하기 시작한 소위 말하는 기축 시대의 조건이 충족되었다. 특히 갠지스강 유역의 마가다 지역은 비옥한 평야 지대로 아리안 유입 이전의 고대 문명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진 고행 문화가 민중의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새롭게 등장한 자산가와, 브라만 사제계급과 주도권을 경쟁하던 크샤트리야 왕족 계급은 그들의 권력과 재산, 지나친 제식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타력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사문을 응원했다. 그들을 후원함으로써 그 수행의 공덕이 자신들에게도 온다는 관념마저 정착했다. 수행에만 집중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종교철학적 요인: 인도 철학이 이상하리만큼 천착했던 화두는 바로 ‘나’였다. 베다 이래 ‘나’ 또는 ‘자아’를 나타내는 대표적 용어는 아트만(ātman)인데, 가장 오래된 인도 종교 문헌인 『리그베다』에서만 30회 등장한다. 물론 베다기 인도인의 관심사는 궁극적 실재 곧 브라만(Brahman)에 있었다. 그 궁극적 실재가 ‘나’일 수도 있다는 사고는 우파니샤드 시대에 이르러서야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우파니샤드는 바라문교 전통의 절정에 해당하는 철학 사상을 담은 문헌으로 초기 문헌은 불교보다 이른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범아일여를 주장했는데 초월아와 내재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라는 것이다. 초기 힌두교는 과도하리만큼 이 주제에 집중했다. 영원하고 무결점이며 변화하지 않고 지고의 환희인 궁극적 실재와 ‘나’와의 연계를 위해 직관과 명상 철학적 사유를 동원했다. 범아일여를 인정하든 부정하든 당시 거의 모든 사상가나 수행자는 이 ‘자아’의 문제에 몰입했다.
고타마 붓다는 내 발등의 불을 끄는 것이 먼저임을 직시했다.
바라문교 역시 현실을 고(苦)로 보는 관점은 유사했다. 베다 이래 바라문교는 언제나 제식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그들에게 카르마(karma)는 제식을 의미했다. 결과를 가져다주는 행위가 그들에게는 제식이었던 것이다. 제식을 행함으로써 죽은 후 브라마 곧 범천과 함께하는 세계에 합류하기를 희망했던 바라문교 전통을 따르는 자들과 달리, 사문주의 전통에서는 카르마를 개인의 과보를 이끄는 행위로 이해했으며, 현실 삶과 직결된 자아와 세계의 본질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다. 붓다는 삶의 촉매가 욕망이라는 점을 직시하고 욕망의 다스림 없이는 생로병사를 겪는 우리의 삶이 필연적으로 고일 수밖에 없음을 인지하고, 영원한 ‘나’ 또는 불변의 ‘궁극적 실재’에 대한 집착을 버릴 것을 강조한다. ‘나’를 찾아가던 눈이 먼 창공이 아닌 내가 딛고 있는 땅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진지한 수행과 열린 토론 문화
기원전 6세기 무렵, 갠지스강 유역의 북인도에는 세습을 통해서가 아닌 다양한 사회 계급 출신으로 형성된 또 다른 지식층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바로 슈라마나(Śramaṇa), 사문(沙門)이다. 그들은 브라만과는 달리 자발적으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고, 공동체를 결성했다. 당시 고행이 상당히 유행했고, 또한 출가주의와 탁발걸식 등도 수행자의 덕목으로 정착했다. 신적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유물론적 사고와 현실의 고를 합리화하는 윤회 사상을 부정하는 사상도 등장했다. 도시 주변의 농원에서 이들 신흥 사상가들에 의한 공개 논쟁과 같은 이벤트도 성행했다. 이는 대중 앞에서 가르침이나 논쟁을 펼치지 않았던 베다 전통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이러한 장면은 『니까야』 여러 곳에 나타난다. 붓다 역시 의문을 덮거나 비밀스럽게 전달하는 방식을 선호하지 않았으며, 경험할 수 없고 검증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지식에 대한 부정적 입장은 확고했다.
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길, 함께 가는 길
게송으로 이루어진 고층의 경전군에는 당시 수행자들의 삶에 대한 기술이 많이 보이는데, 『숫타니파타』의 『코뿔소경』은 수행자는 홀로 다녀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반면 『비나야(Vinaya)』에는 붓다의 제자인 오비구가 최초의 상가를 형성하고 최초의 가르침을 받는 내용이 나온다. 『숫타니파타』에는 “혼자서 좌선하며 사문은 명상을 익혀라. 혼자 있는 것에서 기쁨을 찾아라. 혼자인 것이 해탈에 이르는 길이다”(Sn. 718)라고 해 은둔과 고립을 독려했던 반면, 율장인 비나야는 상가 공동체에서 지켜야 할 규율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담고 있으니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다. 최초기의 경전군에서 수행자는 홀로 길을 걷는 자임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붓다 입멸 후 제자들이 실행한 첫 번째 임무는 불법의 보존이었고, 이를 통해 널리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최경아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석사, 인도 뿌네대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상임연구원 등을 지냈으며, 현재 동국대 다르마칼리지에서 강의하고 있다. 「자아(self)와 개인(person)에 대한 정의 고찰 –초기 불교를 중심으로-」, 「인도 초기 대승의 수행문화-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의 기원과 전개」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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