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은 느리게 빠르게 조절할 수 있을까?

물리적 시간과 체험된 시간

이남인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물리적 시간은 물리학의 연구 대상이 되는 시간이다. 물리학은 물리적 대상의 본질적 속성 중의 하나로서 시간을 연구한다. 그러나 모든 물리학이 시간을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전제에 입각해 있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물리학은 시간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 뉴턴의 고전물리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시간을 각기 다르게 이해한다. 고전물리학에 따르면 시간은 외적 대상과 무관하게 자신의 본성에 따라 그 자체로 느리거나 빠르지 않게 균등하게 흘러간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에서 시간은 균등하게 흘러가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운동계의 상태가 변화함에 따라 시간이 더 빠르게 흘러가기도 하고 더 느리게 흘러가기도 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물리학이 각기 다른 전제로 시간을 다르게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우선 근현대 물리학은 모두 시간을 수학적 시간, 즉 수학적인 크기를 가지고 있는 시간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근현대 물리학은 모두 시간을 인간이 그것을 의식하느냐 여부와 무관하게 자체적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인간이 그것을 의식한다고 해서 더 빨리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서 더 느리게 흘러가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그것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시간은 자신의 고유한 법칙에 따라 흘러간다. 이는 뉴턴의 고전물리학의 시간도 마찬가지이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상대성 이론에서 시간이 더 빨리 흘러가고 더 느리게 흘러가고를 결정하는 것은 운동계의 상태이지 인간이 그것을 의식하느냐 여부가 아니다.

물리적 시간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인간에 의해 의식된 시간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처럼 인간에 의해 의식된 시간이 바로 체험된 시간이다. 그러면 물리학적 시간과 구별되는 체험된 시간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 체험된 시간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물리학적 태도를 벗어나 일상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 물리학적 태도를 취하기 이전에 일상적 삶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시간이 체험된 시간이다. 새해 첫날인 2023년 1월 1일, 설날인 2023년 1월 22일, 즐거웠던 지난주 수요일, 힘들었던 지난주 목요일,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내일, 이번 주 첫 출근하는 월요일, 이번 주 첫 번째 회의가 시작되는 월요일 오전 10시 등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체험된 시간을 경험한다. 체험된 시간의 여러 예들이 보여주듯이 그것은 “새해 첫날”, “설날”, “즐거웠던 날”, “힘들었던 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 “이번 주 첫 출근하는 날”, “이번 주 첫 번째 회의가 시작되는 시간” 등 우리의 삶에 대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시간이다. 체험된 시간은 모두 알록달록 다양한 의미로 채색된 시간이다.

물리적 시간과 달리 체험된 시간은 그것을 체험하는 주관의 상태에 따라 더 빠르게 흘러가기도 하고 더 느리게 흘러가기도 한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재미있는 강의를 들으면 시간이 빨리 흘러가고 재미없는 강의를 들으면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 또 물리적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길이가 동일한 시간도 젊은 시절에는 천천히 흘러가지만 나이가 들면 빨리 흘러간다고들 한다. 이처럼 그것을 체험하는 주관의 상태에 따라 천천히 흘러가기도 하고 느리게 흘러가기도 하는 시간이 물리적 시간과 구별되는 체험된 시간이다.

체험된 시간은 발생적 관점에서 볼 때 서로 층이 다르다. 능동적으로 체험된 시간과 수동적으로 체험된 시간이 구별된다. 우리가 어떤 일이 있었던 이전의 어느 시간을 힘들여 기억해내는 경우 “기억된 과거의 시간”은 능동적으로 경험된 시간이다. 그 이유는 그 시간을 기억해내기 위해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시작할 미래의 어느 시간을 힘들여 선택할 경우 “선택된 미래의 시간” 역시 능동적으로 경험된 시간이다. 그 시간을 선택하기 위해서 특별한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시간이 이처럼 능동적으로 경험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시간은 주체의 특별한 노력이 없이도 수동적으로 경험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커피 향기가 풍겨 나오는 어떤 커피집 앞을 지나가면서 유사한 커피 향을 처음으로 맡았던 10년 전의 어느 날을 떠올릴 경우 이처럼 떠오른 “10년 전의 어느 날”은 그의 특별한 노력이 없이도 떠오른 시간이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경험된 시간이다.

수동적으로 경험되는 시간 중에서 특별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현대 철학의 중요한 사조 중의 하나인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E. Husserl, 1859~1938)이 1905년 『내적 시간 의식의 현상학』 강의에서 분석하고 있는 “방금 전”-“지금 현재”-“다음 순간”이라는 수동적인 시간의 통일체이다. 이러한 통일체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도-미-솔 도-미-솔 도-미-솔로 이어지는 세 마디 멜로디를 감상하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두 번째 마디의 미 음을 듣는 “지금 현재” 순간 나는 “방금 전”에 들은 도 음을 아직도 기억하면서 붙들고 있고 동시에 “다음 순간”에 울려 퍼질 솔 음을 앞서 예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도-미-솔을 하나의 멜로디로 듣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현재” 순간 미 음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동시에 “방금 전”에 들은 도 음을 기억하고 또 바로 “다음 순간”에 경험할 솔 음을 예상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나는 멜로디의 한 부분으로서의 미 음이 아니라, 도 음, 솔 음 등과 무관하게 혼자서 울리는 미 음만을 듣게 될 것이다. 여기서 지금 막 울려 퍼지는 미 음에 대한 나의 체험을 “인상적 경험”이라 부르고, 방금 전에 울려 퍼진 도 음에 대한 나의 체험을 “파지”라 부르며, 바로 다음 순간에 울려 퍼질 솔 음에 대한 나의 체험을 “예지”라 부른다. 그리고 인상적 경험에서는 “지금 현재”라는 시간이 경험되고, 파지에서는 막 지나간 “방금 전”이라는 시간이 경험되며, 예지에서는 바로 다음에 도래할 “다음 순간”이라는 시간이 경험된다. 그런데 인상적 경험과 파지와 예지는 주관의 능동적인 노력이 없이도 이루어지는 수동적인 체험이며 따라서 이 각각에 대응하는 시간인 “방금 전”이라는 시간, “지금 현재”라는 시간, 막 다가올 “다음 순간”이라는 시간 역시 수동적으로 체험된 시간이다. 더 나아가 파지-인상적 경험-예지의 통일체에 대응하는 “방금 전”-“지금 현재”-“다음 순간”이라는 시간의 통일체 역시 수동적으로 체험된 시간의 통일체이다.

능동적으로 체험된 시간이든, 수동적으로 체험된 시간이든, 모든 체험된 시간은 그것을 체험하는 주체가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는지 여부에 따라 주관적 시간과 상호주관적 시간으로 나누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혼자서 사색에 잠겨 있는 시간은 타인과의 의사소통 없이 그 혼자만 체험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주관적 시간”이라 불린다.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주관적 시간을 체험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과 더불어 시간을 체험할 수 있는데, 이처럼 타인과 더불어 체험하는 시간이 상호주관적 시간이다. 앞서 살펴본 예에서 “설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 등은 상호주관적 시간의 예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은 내가 그 친구와 함께 공유하는 상호주관적 시간이고 “설날”은 적어도 한국인 내지 동아시아 일부 국가 사람들이 모두 함께 경험하는 상호주관적 시간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상호주관적 시간의 범위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공유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 그중에서 지구촌 모든 국가의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객관적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올림픽 경기가 열리는 시간, 다음 유엔 총회가 개최되는 시간 등이 객관적 시간의 예에 해당할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체험된 시간은 무수히 다양한 의미로 채색된 시간이다. 그런데 체험된 시간 중에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특히 중요한 시간이 있다. 이처럼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체험된 시간을 카이로스(kairos), 즉 결정적 시간이라 부른다. 앞서 주관적 시간과 상호주관적 시간의 구별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카이로스 역시 주관적 카이로스와 상호주관적 카이로스로 나눌 수 있다. 주관적 카이로스는 어떤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시간, 이러한 점에서 그에게만 특히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간을 뜻한다. 이와는 달리 상호주관적 카이로스는 상호주관적인 공동체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시간을 뜻한다. 동서의 역사를 통틀어 우리는 공동체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상호주관적 카이로스를 다수 기억한다. 동서고금의 성현이 탄생한 때가 상호주관적 카이로스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남인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부퍼탈대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현상학과 해석학』, 『후설과 메를로 퐁티-지각의 현상학』, 『현상학과 질적 연구』, 『예술본능의 현상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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