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 위기의 지구, 금강경에서 답을 찾다

자연 다시 보기의 출발선에서
있는 그대로가 불교다

김규칠
대한불교진흥원 이사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온 생명이 경험하는 자연적 존재 또는 그 부산물이다. 그런데 경험하지만 피상적으로 경험한다. 지구의 대지에 대해서조차 인간은 일부분밖에 알지 못한다. 우주 대자연의 시작도 끝도 모르고, 궁극적 근원 같은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근원에 관한 모든 이론과 형이상학적 언명들은 추론과 가정, 관념적 추리 또는 문학적 상상일 뿐이다. 불교에 조예가 있는 유명한 소설가이며 철학자인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고금의 철학과 종교가 세월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기발하기는 해도 인간과 우주의 본질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부분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책이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기 쉽지만,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은 환상문학이라고 한다면 흥미진진하게 읽힐 수 있다.” 이념이나 관념은 불변의 그 무엇이 아니라, 당대의 이성으로 짜 맞춘 환상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브라흐만 신화나 창세기 같은 이야기는 상징적인 우화로 보는 것 이상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붓다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묵묵부답했다. 선인의 말처럼 자기 스스로를 제대로 알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고, 아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겸허하고 정직한 태도가 출발점이 되어야 하리라. 잘 모르거나 미심쩍은 문제에 대해서도 말할 수는 있겠지만, 단정적으로 주장하고 우기는 건 삼갈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존재론은 존재의 세계를 다 잘 아는 듯이 설을 펴왔다. 그러나 실제 인간은 세상에 대해 극히 일부분만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연을 한정할 수 없는 자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개념 자체가 불교에서 말하는 유루법(有漏法)으로 누수가 있다. 자연이라는 존재 세계의 전체를 생각할 수 없고 논할 수 없으며 자연을 확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절대적 불가지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들을 기초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 수밖에 없다. 대지의 언저리에 대해 체험을 통해서 조금 터득한 것은 있다. 넓고 깊은 속까지 일일이 다 알지 못하지만 표면에 붙어살면서 느끼고 배운 것은 있다. 우리가 보기에 분리와 단절도 있고 접속과 연결도 있으며, 때로는 하나로 다 통하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여럿으로 제각각 달라 모두가 차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온갖 양상으로 변용하기도 하면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머무르지 아니한다. 존재하는 것을 어떤 것으로 규정한다고 해도 그 규정대로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존재는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어떤 것, 어떤 존재자란 없다. 오로지 생성하고 이행하며 변화와 소멸을 되풀이하는 움직임, 사건, 흐름 또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이런 움직이는 모양이나 양태도 ‘어떠어떠한 것’, 고정불변하는 어떤 것으로는 없다. 그런데 생기고 변하고 또 생기고 변하고, 없어지며 변화하는 것은 확실하다. 생명체는 살려고 하는 의지와 생명력을 갖고 태어나 줄기차게 살려고 하는 것도 확실하다. 최대한 살아 있음을 유지하고 자기 존재를 지키고자 하며, 자기를 더 긍정하고자 더 발전하고자 하며, 가능한 한 마음먹은 대로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기를 바라는 것도 확실하다. 때로는 피곤하고 지쳐서 쉬고 싶고 머물고 싶을 때도 있지만, 자기를 위해서도 자손을 위해서라도 변화 발전하고자 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세상과 자연의 흐름이 우리의 바람대로 해주지도 않고 그냥 놓아두지도 않는다. 머물고 싶다고 머물게 되지 않는 게 생명의 삶이고 자연의 운행이다. 자연과 생명은 어떤 방식으로든 가만있지 않고 변화한다. 별들이 생성하고 변화하고 소멸하는 우주처럼 무생물마저도 변화한다. 그래서 붓다는 “머무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을까? 어디에 집착해 무언가를 주장하며 머물려고 한다면 불교의 핵심을 벗어난다. 그러므로 불교는 붓다의 주의(Buddhism)가 아니다. 『금강경』의 가르침처럼 어떠한 상, 어떠한 주의 주장, 어디에도 머물지 않음이 불교다. 어떠한 강밀도(intensity), 어떤 순간이나 기간, 속도 같은 것에도 불변의 법칙은 없다.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고 생성하며 변하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라고 한다면 ‘있는 그대로’가 불교다. 그러나 ‘있음’을 어떤 정태적 상태로 머물러 있음으로 본다면 ‘있는 그대로’는 완전히 잘못 보는 것이 된다. 

자연을 불교식으로 본 것이 연기법이다. 그런데 연기법이라고 할 때의 법은 법이 아니다. 『장군죽비』에서 휴암이 설파한 것처럼 “연기는 비연기로 나아가고, 비연기는 진공묘유로 나아간다.” 흔히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식으로 사물과 사물의 상관관계를 말하고 사물은 어느 것도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 또는 저것이란 것 자체가 이미 이것과 저것의 연기적 결합으로 생긴 것이라 그런 식으로 엄밀하게 파고들면 이것이나 저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연기는 비연기, 즉 공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이 공 또한 공한 것이라 공에 머물 수 없다. 공즉시색이요 공불이색이다. 만남과 접속의 관계 그리고 공의 도리에 따라 한정 없는 변멸이 일어난다. 이게 연기법이다. 끊임없는 변멸 속에서 차이와 다양성을 생성하고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 연기법이다. 다시 한번 말하건대 불교는 펄펄 살아 움직이는, 한정 없는 대지와 같다.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하나가 되자는 자연주의는 아니다. 자연적 자유 개념처럼 한쪽에 기울고 분절되고 구획된 의미의 자연도 아니다. 문화와 분리 단절된 의미로서의 자연도 결코 아니다. 문화와 문명에 복속해 절단을 당하기만 하는 자연은 더더구나 아니다. 어떤 개인이 경험하든 하지 않든, 어떤 식으로 경험하고 인식하든 자연은 끊임없는 생성과 변멸의 움직임이고 과정이다. 그러므로 대자연에는 고정불변의 본질이나 실체라고 할 것이 없다. “그 어떤 상에도 머무르지 않음”, “모든 상을 상 아님으로 보고 실체 없음으로 본다면 제대로 보는 것”이다(『금강경』 참조). 우리는 지금까지 자연과 문화를 구분해 자연을 피동적이고 말이 없는 정물 또는 죽은 기계처럼 여겼다. 

그러나 오늘날 대지는 행동으로 격렬히 저항하고 있다. 아니, 까마득한 옛날부터 대지 스스로가 낳은 온갖 생물과 무생물로 하여금 대지의 지질과 대기와 기운을 생성하게 하면서 행동하고 표현해온 것을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잘 모르면서도 상상과 환상에 기대어 임의적으로 본질주의적 관념을 존재 세계의 전제로 설정하고 주입시켜왔다. 절대자, 이데아, 물질, 형상, 질료 같은 관념과 상징 형식의 체계를 수립해 거기서부터 사회 구성의 원리를 도출했다. 이데아든 물질이든 무엇이든 본질적 근거로 규정하는 것에 불교는 동의하지 않는다. 마치 존재의 근거나 본질을 꿰뚫고 다 아는 듯이 어려운 말들을 만들어 공리처럼 세워놓고,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고 엮어서 세계를 지배하는 방식에 불교는 동의하지 않는다. 보다보다 못해 대지가 행동으로 나서 붓다의 가르침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하여 독화살의 비유와 같이 지구 기후 변화, 생태계의 위기, 야생의 일대 저항으로 팬데믹 사태라는 독화살을 맞아 이 독화살을 빼는 것이 급선무가 되었다. 지구는 화택(火宅)으로 변하기 시작한 지 오래, 이제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할 수가 없다. 이 지구 자연, 즉 대지부터 구해야 한다. 

인간이 대지의 생성 변화에 의해 출현한 이상 대지의 연기법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생성과 변화는 대지의 역능이 스스로 그러함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대자연의 배후에 조종자가 있거나 바깥에 초월적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상정함은 이미 그 유효성을 상실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속류 유물론처럼 물질 또는 질료를 본질로 보는 사고방식으로 기운다면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것도 불교의 핵심에 어긋난 이야기가 된다. 있다가 변하고 없어지며, 없다가 다시 생기는 생성과 변멸의 자연적 연기 원리를 우리가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부분을 신비스럽게 여길 수는 있다. 그렇다고 증명할 수 없는 환상 같은 이야기를 주장해서는 곤란하다. 『반야심경』과 『금강경』의 내용 가운데 핵심적 가르침대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어떻게 보는 것이 그렇게 보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가 사는 대지의 생태적 환경과 관련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지금 여기서 무엇이 중요한 과제이며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할 것인가, 그것이 우리의 질문이다. 앞으로 그 물음을 하나씩 함께 생각해보기로 하자.

김규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동 대학 신문대학원을 졸업하고, 비엔나대학과 와세다대학에서 연수를 마쳤다. 외무고시에 합격해 18년간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BBS불교방송』 사장,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 등을 지냈다. 현재는 대한불교진흥원 이사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탈정치시대의 새로운 항로』, 『불교가 필요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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