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의 견해 | 탈종교 시대 종교 간 대화

인류 문명의 미래와 종교의 운명에 관한
이슬람교의 견해

이희수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이슬람 전통의 미래적 재해석과 잃어버린 공동체의 복원이 답이다
인류 문명의 미래와 종교의 운명에 관한 예측은 결국 인류의 근원적인 삶의 태도의 변화와 그를 견인하는 적정한 종교적 재해석의 역동성에 달려 있을 것이다. 긴 인류 역사를 반추해보면 오늘의 상황이나 펼쳐지는 새로운 미래에서도 종교는 의미 있는 또 다른 한 변곡점을 맞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해 보인다. 이슬람교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절대적인 신의 영역이었던 인간 배아 복제 기술의 시대에 이슬람 자체가 갖는 깊은 영성적, 윤리적 가치를 현대적으로 복원하는 절대적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이슬람의 종교적 미션과 공헌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는 주장이 팽배하다.

이슬람의 생활 전통은 “부자의 곳간에 한 톨의 식량이라도 남아 있는데, 그 마을 주민 누군가가 굶어 죽는다면 공동체 구성원 전체는 천국에 들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자본주의의 물량적 축적을 허용하지만, 이슬람의 관점에서 보면 물질적 풍요는 신이 현세에서 일정 기간 위임해놓은 위탁 자산에 불과하다. 한시적인 부의 개념과 절제된 욕망이라는 두 축을 근간으로 하는 이슬람 자본주의의 핵심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 수백 년간 무한 경쟁과 물량 자본주의, 대량생산과 불필요한 과소비라는 파괴적 개발 사이클에 길들여져온 인류 사회에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 방향과 목표는 신의 모든 피조물과의 조화로운 공존과 함께 “부풀려진 욕망을 절제하거나 줄이고 꼭 필요한 소비를 하면서 시작되는 선순환적 사이클의 복원이다. 물량적 확대 대신 적정 생산을 지향하게 되고, 획일화된 가치 기준을 넘어 다양한 삶의 방식의 소중함을 일깨워나가는 일이다.” 이것이 오늘날 이슬람 세계에서 논의되는 담론의 핵심이다.

한시적으로 신이 위임한 재산이라는 인식은 이슬람 사회 전역에서 대도시는 물론 작은 마을 단위에서도 와크프(waqf)라 불리는 자선 단체나 재단이 설립되어 운영되는 특징으로 나타난다. 와크프는 부자나 독지가들이 신의 위임이 끝난 재산을 기부하는 관행에 따라 공동체의 부의 재분배에 기여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이처럼 이슬람은 정교일치적 체제가 야기하는 전근대성과 역기능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지만, 종교를 뛰어넘는 문화적 총체로 지금도 삶 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주를 왕복하는 초스피드 첨단 시대에도 632년에 완성된 이슬람 율법에 따라 하루 다섯 번의 예배 의무를 줄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종교적 집단 공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1세기에 들어서도 한 달간의 고통스러운 단식을 개혁하자는 논의조차 일어나고 있지 않는 20억 이슬람 공동체의 사고를 집단 광기로 볼 것인가. 하루 세끼 밥 먹는 것이 첨단 시대와 아무 상관없는 포기할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이듯이, 하루 다섯 번 영혼의 배고픔을 채우는 예배도 단순한 율법을 넘어 이미 체화된 문화적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한 달간의 단식을 통해 가진 자 갖지 못한 자 모두가 똑같은 조건에서 약자의 고통과 배고픔을 절절히 체험함으로써 진정한 공동체 정신을 이루어내고 단단한 정체성을 재확인하게 된다. 나아가 예배는 하루 다섯 차례씩 행하는 국민 체조이고 한 달간의 단식은 모두에게 유익한 국민 다이어트 기간인 셈이다. 이처럼 이슬람이 영적인 고양과 도덕적 함양이라는 종교적 속성과 더불어 생활 문화로서 일상에서 융합적으로 작동되는 성격을 이해한다면 ‘종교의 운명’이란 명제 자체가 다른 종교와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고 미래의 모습에 대한 이해도 달라질 것이다.

인공지능이나 로봇 산업 등에 관한 이슬람의 입장은 놀랍게도 부정적이지 않다. 많은 이슬람 철학자들은 이미 이러한 시대적 대변혁을 중세 천 년간 경험하고 주도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AI를 움직이는 빅데이터의 기본 작동 원리인 알고리즘이 바로 이슬람 수학의 결실이다. 대수학을 완성한 9세기 이슬람 수학자 알 크와리즈미가 발명해 사람 이름이 학문 명칭이 되었고, 로봇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스마일 알 자자리는 이미 1206년에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했다. 아흐마드 알 하산은 로봇 공학의 기초가 되는 기발한 장치를 개발하기도 했다.

인류 문명의 미래는 모든 문제의 본질적 원인인 고장 난 생태계 순환 체계를 본연의 상태로 회복하는 노력에 좌우될 것이다. 이러한 목표에 인류 사회는 이전보다 훨씬 심각하고 진지하게 접근하겠지만, 한두 세대 만에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미래를 위한 점진적이고 지속 가능한 변화의 실천적 행동이 지금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다. 경제적 격차의 해소, 등가적 생명의 무게, 가치사슬의 공정한 운용, 모든 피조물에 대한 존중과 예의, 삶의 질을 올려주는 글로벌 어젠다가 동시에 가동되어야 한다.

우주는 큰 하나다. 지구는 작은 하나다. 우리는 다만 생명체의 일부이고 우주 속의 작은 존재라는 원래의 인식으로 되돌아갈 때다. 생물학적인 존재로서 기본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고 배워왔던 공동체적 협력 정신도 희미해졌다. 그 전제에서 다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협력하고, 공동체적 정신을 회복하면서 사람의 가치와 관계의 중요성을 확장하고 AI 시대 문화와 문명의 의미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나와 너를 편 가르고,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고, 사람이 동물을 마구 취하고, 사람이 자연을 훼손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시하며 살아왔다. 함께하는 공존과 공생, 상생과 조화의 지혜를 익혀가는 것이다. ‘내가 살려면 다른 사람에게 약을 주어야 하는 오늘의 팬데믹 상황’이 관용과 연대를 높여나가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국가와 민족 집단에서도 나와 다른 생각, 다른 가치를 가진 상대를 포용하고 예의를 갖추며 존중해주는 열린 문명적 태도가 강조될 것이다. 문명의 열려 있는 정도, 문명의 유연성이 결국 문명 발전과 진보의 결정 변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 종교의 운명을 가르는 접점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인공지능 시대의 개막과 함께 비대면 문화의 자연스러운 수용과 적응, 그리고 일상화가 두드러지면서 배제와 고립이 확산되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삼 “고독력”이 중요한 덕목으로 떠올랐다. 사업상 만나고 예의상 만나고 일정과 일정 속에 하루를 보내는 허둥대는 무의미한 바쁨에서 유의미한 만남(Selective contact)으로 가게 될 것이다. 느슨한 관계가 편하고 좋은 사회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게 되었다. 느슨한 관계, 강요되지 아니한 관계를 통해 생겨난 시간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속도를 늦추고 자기를 되돌아볼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미래의 역할로서 종교가 더욱 단단히 자리 잡고 그 의미를 더하게 되는 절호의 시대적 구도가 다가오는 셈이다. 당연히 종교계 자체가 본연의 초심을 되찾고 물량적, 속물적, 다른 종교에 대한 혐오감을 과감하게 떨쳐내고, 첨단 과학과 최적의 편익 우선주의 패러다임에 의도된 불편함을 주고 속도감에 찌들어 목표를 상실한 인류에게 최소한의 등대 역할을 되찾기만 한다면.

AI 시대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교에서도 종교적 위기와 역할론의 한계에 대한 담론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종교적 가치가 삶 속에 녹아 총체적 문화 체계로 작동하는 이슬람 종교의 특징상, 종교의 운명이란 위기보다는 새로운 역할론과 부흥이라는 쪽에 무게가 실려 있는 듯하다.

이희수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대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 학위 받았다. 현재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성공회대 석좌교수와 이슬람문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중동 역사와 이슬람 문화에 관한 국내 최고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인류 본사』, 『이희수의 이슬람』 등 80여 권의 저서가 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