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고(苦)를 어떻게 분석하는가? |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 A에서 Z까지

불교는 고(苦)를 어떻게 분석하는가?

화령 정사
불교총지종 정사, 보디미트라 ILBF 회장

그림 | 김아름

불교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종교이기 때문에 교리를 여러 가지로 분류한다. 삼법인·사성제·팔정도·오온·십이처·십팔계·삼십칠조도품 등과 같이 숫자로써 교리를 갈래짓는 것을 법수(法數)라고 한다. 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로 분류를 한다. 우선 삼고라고 해 고고(苦苦)·괴고(壞苦)·행고(行苦)의 세 가지를 들고 있다. 고고는 우리가 육체를 지님으로써 느끼게 되는 괴로움이다. 즉 몸의 통증과 병이나 배고픔, 추위, 더위 등으로 인한 괴로움이 고고이다.

괴고는 좋아하고 집착하는 것이 허물어지는 것에서 생기는 괴로움이다. 자신이 늙어가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거나 부자로 살다가 가난하게 되어서 괴로워하거나 명예나 인기가 시들해지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게 되는 것 등에서 오는 괴로움으로 좋은 상태에서 나쁜 상태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괴로움을 괴고라고 한다. 예를 들면 부자였다. 가난해졌을 경우 가난으로 인한 직접적인 고통보다는 가난해졌다는 그 상태에 대한 자괴감이 더 괴롭다. 권력에서 밀려났을 경우에도 권력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육체적, 물리적 고통보다도 권력을 놓쳐버리고 남에게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더 괴로운 것이다. 말하자면 이 괴고는 정신적인 것에 중점을 두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행고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으면서 오는 무상함에 대한 괴로움이다. 이것은 자신이 집착하는 모든 것이 변화해가는 것에서 오는 괴로움으로 경전에서도 “변화하는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하고 있다. 건강하던 나의 육체가 늙고 병들며 사랑하는 사람과도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고 싶지만 이별의 순간이 찾아온다. 떵떵거리던 재산과 명예도 다할 날이 있다. 모든 것이 변해간다. 말하자면 우리의 삶 그 자체가 행고라고 할 수 있다.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하는 것도 이 행고를 말하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이 변화하는 윤회계에 있어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고로 볼 수밖에 없다. 윤회전생하고 있는 범부에게는 괴로움뿐만 아니라 즐거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범부에게 있어서는 그 즐거움이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변화하기 때문에 괴로움으로 변한다. 즐거움이 크면 클수록 거기에 상대적으로 더 큰 괴로움이 따라오기에 진리의 세계가 아닌 윤회의 세계에 있는 범부에게 그것은 절대의 행복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절대의 행복인 열반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행고는 깨닫지 못한 모든 범부가 처한 괴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일체개고인 것이다.

또 팔고(八苦)라는 것이 있다. 『증일아함경』에서는 팔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고성제란 무엇인가? 이른바 태어나는 것은 괴로움이요,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며, 늙는 것도 괴로움이요, 죽는 것도 괴로움이며,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고 오온에 집착하는 자체가 괴로움이다.

이와 같이 경전에서는 생·로·병·사의 사고(四苦)에 원증회고(怨憎會苦)·애별리고(愛別離苦)·구부득고(求不得苦)·오취온고(五取蘊苦)의 네 가지 괴로움을 더해 팔고(八苦)를 내세운다.

팔고 가운데에서 먼저 생고를 살펴보자. 생고(生苦)란 태어나는 그 자체가 고라는 의미이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육도에 윤회하는 자체를 고로 보아 모태에 생명이 깃드는 순간 이미 고를 받도록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일체개고와 마찬가지로 행고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노고(老苦)와 병고(病苦)가 고라는 것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젊고 아름답던 육체가 노쇠해 볼품없어지고 병으로 신음하는 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고통이다. 그리고 늙고 병드는 것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어쩌면 육체적인 고통 그 자체보다도 이로 인해 겪어야 하는 정신적인 불안과 고뇌가 더 클지도 모른다. 즉 감각적, 생리적인 고고보다도 괴고의 면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사고(死苦)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은 누구든지 죽게 된다. 그러나 죽는다는 것은 죽음 자체가 가져오는 고통보다도 죽음으로 인해 겪어야 하는 심리적, 정신적인 고통이 더 클 수도 있다. 애착하는 사람과의 이별, 육신으로서 즐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쾌락에 대한 미련, 재산과 명예에 대한 집착 등등 죽는 그 순간의 고통보다도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고통이 더 크기 때문에 괴고를 더 느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죽음은 생과 함께 윤회에 대한 고통을 가져온다. 불교에서는 무상한 것을 고라고 보기 때문에 생·로·병·사가 모두 행고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기껏해야 육신의 고통인 고고나 애착을 지닌 것이 허물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괴고를 느낄 따름이다. 그러나 생사의 큰 틀을 고로 인식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윤회의 큰 틀을 바라보며 행고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윤회를 초월해 열반을 얻으려는 큰 이상을 지닌 사람밖에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고제에 ‘성(聖)’ 자를 붙여 고성제라고 하는 것이다. 고제는 고를 바르게 인식함에 의해 열반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것은 신성한 것으로서 깨달음의 경지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성제라 한다.

원증회고(怨憎會苦)는 미워하는 사람과 부딪혀야 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으로 사랑하는 사람과는 만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인 애별리고(愛別離苦)와 반대가 되는 상황에서의 고이다. 인간이 혼자서 살지 않고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한은 이러한 두 가지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생활의 갈등은 대부분이 이러한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고 미워하는 사람과 끊임없이 부딪혀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깨닫지 못한 범부인 한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을 바탕에 두고 현실 생활을 해나가면서 오는 고통이 우리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고 가운데에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구부득고(求不得苦)라는 것이 있다. 구하지만 얻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다. 재산, 명예, 권력, 사랑 등을 간절히 바라지만 가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 구부득고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 생활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갈구한다. 무엇인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기가 뜻한 바대로 갖게 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불만이 생기고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한다. 어떤 사람들은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때로는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을 손에 넣기 위해 폭행과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구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고 해도 또 다른 욕심이 생긴다. 이것이 미혹한 중생의 마음이다. 구해도 얻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도 육체적 고통인 고고보다도 정신적 고통인 괴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고 미워하는 사람과 부딪혀야 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 가지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 등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괴로움은 늙고 병들어 죽는 고통과 함께 인간인 이상은 피할 수 없는 괴로움들이다. 이 모든 괴로움이 바로 ‘일체가 고(一切皆苦)’라는 것이다. 일체가 고라는 것은 깨닫지 못한 범부 중생의 삶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또 고에는 세속고(世俗苦)와 승의고(勝義苦)라는 것이 있다. 세속고는 지옥·아귀·축생의 과보에서 오는 고로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고이다. 그러나 승의고는 천계와 인간계의 고로서, 여기에는 즐거움도 많아 중생은 이곳에 태어나더라도 진정한 고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천계와 인간계도 복이 다하면 무너지는 무상한 세계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고의 세계이다. 천상계와 인간계는 지옥이나 축생계 등에 비해 즐거움이 많기는 하지만 열반의 세계가 아닌 윤회의 세계에 속해 복이 다하면 다시 괴로움이 시작된다. 즐거움이 많기 때문에 그것이 끝날 때는 더 큰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 천계와 인간계이다. 중생은 그러한 것을 모르고 도리어 이러한 세계에 집착하고 그것을 구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계에 태어난 우리 중생은 열반을 구하려고 하지 않고 현재의 삶에 집착하며 윤회를 되풀이하는 것이고 따라서 끊임없이 고를 받게 된다. 이처럼 천계와 인간계에 존재하는 괴로움은 일반 중생은 쉽게 느낄 수 없는 미묘한 고이기 때문에 승의고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깨닫지 못한 범부 중생의 삶 자체가 고의 덩어리임을 모르고 그것에 탐착하고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오온으로 이루어진 이 몸 자체가 고의 원인이라는 것을 깊이 자각하고 고를 바르게 이해할 때에 비로소 열반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고성제(苦聖諦)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이처럼 고를 분석하고 강조하는 것은 괴로움으로 가득 찬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우리가 부닥치는 지금의 현실을 떠난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우리 주변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문제 삼아 거기에서 해결책을 찾아내려고 하기에 고를 외면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고를 앞에 내세워 현실 인식과 문제의식을 일깨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그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화령 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교총지종 교육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보디미트라 ILBF(국제재가불교포럼) 회장으로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 『불교 교양으로 읽다』, 『담마빠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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