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와 불성
정세근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친애하는 B에게 :
오랜만이오. 젊은 시절부터 종교적인 사색과 그것에 바탕을 둔 실천적인 노력을 해온 B를 기억하오.
늘 신과의 만남을 이야기했고, 단순한 자기의 문제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의 행복을 고민해온 B였소. 내가 B의 종교관에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은 B의 종교를 존중해서라기보다는 B의 종교관이 보여주었던 실천적 의지 때문이었소. 내 생각에는 그것이 나보다는 이웃을 생각하는 것이라면, 또 그 이웃이 세계시민을 지향한다면 B의 종교가 무엇이든지 나는 거룩하다고 믿소.
종교가 무엇이오? 작게는 나의 죽음을 바라보는 것이고, 크게는 모든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는 것 아니겠소. 죽음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우리라오. 그래서 다시금 삶을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삶을 가치 있고 풍요롭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 종교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철학과 종교는 같은 길을 가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철학은 삶 쪽에, 종교는 죽음 쪽에 좀 더 가깝지 않을까 하오. 과학은 오직 삶을 좇고 있지만 말이오. 젊어서는 과학을 따르고, 나이 들어서는 철학을 배우고, 죽음 앞에서는 종교를 마주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오. 그러나 철학, 종교, 과학 모두 ‘잘 살자’는 데는 길을 같이하는 것이오. ‘무엇이 잘 사는 것이냐’는 물음이 반드시 따르지만 말이오.
불교는 가장 철학적인 종교라오. 그래서 어렵다고들 하오. 이는 불교가 가장 삶에 가까운 종교라는 말이 되기도 하오. 불교는 결국 삶을 구원하고 해방하기 위한 종교라는 것이오. 죽음 이후를 말하면 살아 있는 누구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소만, 삶을 말하면 이것저것 논쟁거리는 많지만 훨씬 피부로 다가올 수밖에 없소.
불교는 그래서 언어를 말하고, 진리를 말하고, 자비를 말한다오. 언어는 소통의 도구이고, 진리는 가치의 설정이고, 자비는 윤리의 실천이라오. 소통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틈새를 마련해주고, 무가치한 삶에서 그 목적을 찾아주고, 만물을 슬프게 여겨 사랑하는 자세를 지니게 해주는 것이 불교라오.
B는 나에게 물은 적이 있소. 이런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냐고? 어렵게 들릴 수 있지만 그것은 바로 ‘나 없음’ 곧 ‘무아(無我)’라오.
역사적으로 볼 때 불교는 브라만교의 반명제, 곧 반발로 나온 가르침이오. 브라만교는 철저하게 ‘나’를 강조하오. 나는 다름 아닌 법력, 곧 다르마(dharma)의 주체이자 결과라 한다오. 우주를 관통하는 법칙이 있고 나는 그에 따른 의무가 있소. 소임을 다하면 다음 생에 잘 태어나는데, 이상적인 것은 그런 굴레에서조차 벗어나는 것이오. 그것을 ‘풀림’ 곧 ‘해탈(解脫)’이라고 하오. 어떤 것에도 잡혀 있지 않은 내가 가장 좋다는 것이오. 그런 점에서 브라만교는 철저하게 내가 있소.
브라만교의 ‘나’는 둘로 나뉘오. 하나는 ‘작은 나’이고, 다른 하나는 ‘큰 나’요. 작은 나는 보잘것없는 현실 속의 나이고, 큰 나는 그 작은 나가 이루어낸 최고의 나요. 따라서 큰 나는 곧 신이라오. 이른바 ‘범아일체(梵我一體)’라는 것은 작은 내가 아니라 큰 내가 브라만과 합일하는 것을 가리키오. 우리도 어느 날은 자신이 왜소하고 못마땅하지만, 어느 날은 자랑스럽게 ‘이게 바로 나야’라고 느낄 때가 있지 않소. 뒤의 나는 큰 나이자 신을 닮은 나라오.
그런데 붓다는 이게 바로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았소. 작은 나이건 큰 나이건 내가 있다면 우리는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었소. 그리하여 석존은 철저하게 나를 없애고자 한다오.
이제 내가 B에게 물어봅시다. ‘큰 나’를 만드는 것이 쉽겠소, 아니면 ‘아예 나라는 것은 없다’고 아는 것이 쉽겠소? 큰 나는 법에 따른 의무를 동반하지만, 나 없음은 어떤 법에도 구속될 수 없소. 큰 나가 윤리적 주장이라면 나 없음은 사실적 언명이오. 큰 나는 ‘큰 나가 되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지만, 나 없음은 ‘본디 내가 없는데 무슨 작은 나와 큰 나가 있냐’라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오.
브라만교가 의무를 강조해 당위적으로 목표를 정하고 있다면, 불교는 사실을 강조해 그것을 알기만 하면 해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나도 그다지 쓰고 싶지 않은 지나친 표현이지만, 브라만교는 종교에서 머물고 있다면 불교는 과학적으로 나가고 있다고 말해도 될 듯하오. 이른바 ‘오온(五蘊)’이라는 것이 바로 무아 이론의 근거가 되는 것은, 나로 보이는 것도 오온의 이합집산에 불과하기 때문이오.
불교는 그런 점에서 철저히 반실체주의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오. 실체는 없다. 실체라는 것이 우리의 인식을 왜곡시키고 변형시켜서 개인의 번뇌와 사회적 질곡을 낳는다. 따라서 그것만 알아차린다면 우리는 해탈의 길로 나설 수 있다. 이것이 청년 싯다르타의 깨달음이었소.
B여, 안타깝게도 불교의 발전은 이 단순한 깨달음을 이리저리 흩어놓아 이러저러한 불교를 낳고 말았다오. 내가 늘 불교는 천 개, 만 개의 불교가 있고 나의 주장도 그것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소.
특히 대승의 여래장 사상은 불교를 실체화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오. 여래장이란 ‘여래(如來)’라고 불리는 불성이 ‘누구에게나 담겨 있다(藏)’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종의 씨앗으로 구체화한 것이라오. 그런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곧 현실에서 있다는 것은 아니오. 따라서 논리로만 볼 때 그것은 잠재성 그 자체를 실체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오. 씨앗이 있어서 꽃을 피우는 것은 맞지만, 아빠와 엄마가 만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는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이오. 사실 여래장의 장은 빈 자궁과 비슷한 것이라오.
그리하여 자성(自性)이라는 표현이 불교에서 남용되고 있다오. 언뜻 훑어보기만 해도 자성은 무아와 모순되는 것이 뻔한데도 말이오. 그래서 나는 늘 ‘무자성(無自性)’의 원리에 충실하라고 말한다오. 슈바브하바(svabhāva)가 아닌 니히슈바브하바(niḥsvabhāva)로 가라고 말이오.
B는 불교의 핵심을 연기라고 말했던 적이 있소. 그렇소. 모든 것은 인연의 일시적 결합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자성보다는 무자성이 앞서야 하는 것이오. 이는 ‘모든 있음은 없음에서 나온다(有生於無)’라는 노자의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오.
나는 요즈음 B가 ‘무의 철학’을 말하는 것을 보고 많이 기뻤소. 그것은 불교의 무아와도 뜻을 함께하는 것이라오.
건강을 비오. 없음 속에서 평온하길!
정세근
국립대만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사)한국철학회 제53대 회장, 국가미래교육을 위한 전국철학회연석회의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노장철학과 현대사상』, 『윤회와 반윤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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