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부석사 소조아미타여래좌상 | 문화재의 시선으로 보는 절집 이야기

무량한 날,
너를 위해 어둠 속에 있겠다

영주 부석사 소조아미타여래좌상


그 사내가 또 찾아왔다. 벌써 2년째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인적 드문 시간에 무량수전으로 들어와 내 앞에 엎드리는 50대 중반의 저 사내. 하도 간절하게 우물우물 혼잣말을 하기에 귀 기울여 들어보니, 어느 날은 죽은 아내에게 두 시간이 넘게 사과했다가, 어느 날은 자기 잘못이라며 자책도 했다가, 어느 날은 아무 말도 않고 울다가, 얼마 전부터는 조용히 절만 한다. 요즘 나이 50대면 젊은 축이라는데, 얼마나 아내에게 미안하면 꾸뻑꾸뻑 엎드리며 저리도 간절한 절을 하는가. 사내의 집은 경기도에 있는데, 경상북도 영주시 이곳 부석사까지 3시간이나 차를 달려오는 정성을 보이는가… 안쓰럽고, 기특한 마음이 든다. 그래, 천 년 전에도 너 같은 이가 있었고, 백 년 전에도 그런 이가 있었지. 괜찮다. 후회도 미련도 시간이 지나면 옅어질 테니, 절이나 실컷 해라. 기다려줄 것이니.

영주 부석사 전경
저 사내가 그 먼 길을 달려 이 부석사에 오는 이유는 죽은 그의 아내가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 아내의 어미도 나를 사랑했다. 한 번도 말을 하진 못했지만, 실은 나도 그녀들을 사랑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나는 나를 분별없이 사랑하고 수행하는 이들을 서방정토 극락에서 교화하기 위해 대원(大願)을 품었기 때문이다.

부석사 소조아미타여래불을 모신 무량수전(왼쪽)과 안양루(오른쪽)
그렇다. 나는 부석사 무량수전의 소조아미타여래불(고려, 국보)이다. 1962년의 12월 말쯤에 나를 국가가 국보 제45호로 지정했다며, 다행히 내가 앉은 전각 전체를 국가에서 관리하기 시작했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부석사가 신라 의상대사에 의해 지어지고 화엄종 본찰이 된 고려 시대에 아미타여래좌상으로 이 몸을 얻은 후 이 무량수전 안에 동쪽을 바라보고 앉았다. 그때 승려들과 마을 사람들이 나를 동쪽으로 앉힌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 서방정토를 향해 절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잡았으니, 나를 바라보며 절을 하는 이는 자연스럽게 서방정토를 향하게 된다.


여기 앉아 있으면 무량수전을 청소하느라 보살들이 문을 활짝 열었을 때, 멀리 산 아래로 손바닥 편 듯 펼쳐진 부석사의 전각들이 보인다. 무량수전 앞 팔각석등, 안양루, 조사당, 삼층석탑, 당간지주… 은하수처럼 또는 층층의 다랑이 논처럼 펼쳐져 보이는 전각과 유물들을 보면 마치 절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엎드려 절을 하고 있는 듯도 보인다.

꼿꼿이 엄하게 서 있는 것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들뿐이다. 무량수전을 지키는 무사들처럼 서서, 가끔은 누군가에게 어깨를 내어주기도 하고, 어떤 날은 그저 옆에서 우는 모습을 바라봐주는 코끼리 친구가 되어주기도 한다. 수백 년 지나니, 배흘림기둥이나 나나 다를 바 무엇인가 싶기도 하다.

끝없는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가, 무한하고 영원하다는 뜻을 가진 무량(無量)한 날 동안 서방정토 극락으로 안내하는 길을 열기 위해 문을 열어두었던 날에 찾아온 수많은 이야기들을 가끔 떠오르게 하는 이들이 있다.

백 년쯤 전에도 저 사내처럼 나를 찾아와 10년을 절하던 여자가 있었다. 무섬마을에서 보름에 한 번씩 찾아오던 여자. 그녀는 무섬마을에 열여섯에 시집와 딸 하나를 얻고 스무 살에 남편을 잃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내성천 외나무 다리를 건너 이 소백산맥 줄기 봉황산의 돌길, 흙길을 올라왔다. 무섬마을은 독립운동하다 별이 된 이들이 많은 마을. 죽은 남편을 위해 절을 한 그녀의 딸은 또 딸을 낳고, 그 딸이 결혼해 저 사내를 만났다. 윤회는 그렇게 무량하게 돌고 돌아 온다. 그들은 한때 사랑하는 이를 잃어 슬프고 서럽고 안타깝더라도, 모두 말하는 것은 같다. 사랑이다.

천 년 전 사람들이 저 아래 두 개의 쌍둥이 석탑, 부석사 삼층석탑에 넣은 부처의 사리구를 봐도 그렇다. 무상한 세월을 지나면서, 비바람 풍파를 오죽이나 겪었던가. 그사이 돌탑의 사리구는 누가 가져갔는지 사라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쌍둥이 석탑을 돌았다. 탑돌이를 하고, 쓰다듬으며 간절함을 담아 기도한 그 마음들이 쌓이고 쌓이다가… 쌍둥이 돌탑은 스스로 거대한 사리가 되어버렸다. 사리를 만들어낸 것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오늘도 무량수전에서 가장 어두운 곳에는 내가 있다.

가장 밝은 곳은 마룻바닥이다. 저 햇빛에 반사된 반질반질한 마룻바닥에 엎드려 절하는…
마음속에 사연 하나씩 들고 있는 이들이여, 언제든 오라.

무량한 날, 너를 위해 내가 어둠 속에 있겠다.


글|정진희
방송작가, <KBS 다큐온, 다큐공감, 체인지업 도시탈출>, <EBS 요리비전, 하나뿐인 지구, 희망풍경>, <MBC 다큐프라임> 등에서 일했고, 책 『대한민국 동네빵집의 비밀』을 출간했다.

사진|마인드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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