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순례와 방하착(放下著)
김용섭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잊고 바쁘게 생활하고 있다. 디로딩(deloading),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일상의 부담을 줄이는 내려놓기의 일종으로 불교 수행 방법의 하나인 방하착(放下著)과 유사한 개념이다. 나는 음력 8월 24일에 태어났다. 매달 음력 24일이 관음재일이기 때문에 생일 자체가 불교와 인연이 깊다. 나는 네 살 무렵 부모님을 따라 오대산 월정사 부근 진부에서 2년간 살았고, 횡계에서 대학 시절 여름에 고시 공부를 하기도 했다. 유년 시절에 부모님을 따라 월정사에 갔고, 성장한 후에는 강원도 평창이나 용평으로 놀러 가면 역시 월정사에 들르곤 했다. 강원도 진부에서 보낸 유년 시절 어느 가을날 집 뒤뜰의 철조망을 친 밭에 고추잠자리가 앉아 있는 것을 좇던 추억이 있다. 당시 고추잠자리를 보면서 느꼈던 것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나 제법무아(諸法無我)가 아닐까 생각한다.
산사(山寺)에 가면 마음이 편안한 것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대학 시절 이래 등산을 좋아해 시간이 나면 전국에 있는 명산대찰(名山大刹)을 찾아다녔다.
우선 나와 불교와의 인연은 서초동 예술의전당 맞은편에 있는 신중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이다. 삼성동의 봉은사와 사당동의 관음사로 줄지어 걸어서 소풍을 몇 차례 다녀왔던 적이 있다. 당시 소풍을 걸어서 오고 가느라 힘들었지만 절 안에서 준비해 간 김밥도 먹고 선생님과 사진도 찍던 아련한 추억이 남아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어머니를 따라 사당동 배나무골에 있는 영산법화사(靈山法華寺)라는 절에 다니며 법고(法鼓)를 치면서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을 수지 독송하던 시간이 떠오른다. 인자한 노스님은 새벽이면 법고를 치면서 배나무골 일원을 크게 한 바퀴 도셨는데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때가 새벽 5~6시경이었다. 멀리서 법고 소리가 들리면 일찍 일어났던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여러 책 중에서 불교 서적도 읽었는데, 일본의 소림일랑(小林一郞)이 쓰고 이법화가 번역한 『법화경강의(法華經講義)』전 10권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있다.
나의 대학 시절에, 불명(佛名)이 자혜정(慈慧淨)인 어머니는 집에 불전을 모셔놓고 예불을 올리셨다. 아침에 부처님 전에 자식의 성공을 위해 기도를 올리셨다. 나를 불교의 길로 이끈 자애로운 나의 어머니는 지병으로 인해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발고여락(拔苦與樂)의 불교적 생활의 가르침을 일상에서 몸소 보여주셨다. 그후 사법연수원 시절에는 반야회에 가입했으나 열심히 활동하지 못했다. 다만 불광사에서 지도법사인 무진장 스님의 법문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대구에서 육군 장교로 근무하면서 전투체력의 날인 수요일 오후에 팔공산 동화사의 갓바위를 수십 차례 다녀왔던 기억이 있다. 당시 갓바위에 가서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제대하면서 통상적 진로인 변호사의 길이 아닌 법제처 공무원 특채로 진출해 행정법학자의 삶을 살게 된 것이 갓바위의 기도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독일 유학 후 법제처에서 행정심판담당관으로 활동하다가 경희대 교수로 부임한 후 독일의 만하임대 유학 시절 지도교수인 게어드 로엘레케(Gerd Roellecke) 교수님을 초청해 강연회를 마치고 3박 4일 일정으로 불교와 유교의 대표적 도시인 경주와 안동 그리고 팔만대장경 목판본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를 갔던 적이 있다. 그는 만하임대 총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천주교를 신봉하는 법학자임에도 한국 불교와 유교의 찬란한 문화에 깊이 감명을 받고 독일로 돌아가셨다.
2000년대 초반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수덕사를 비롯한 서산 지역을 문화 탐방하기 위해 자주 여행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상왕산 개심사의 대웅전을 찾아 잠시 참선을 하는 사이 함께 간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이 연필로 아미타불상을 스케치했다. 나는 아들한테 그 그림을 색칠하도록 한 뒤 그것을 액자에 넣어 20년 이상 거실에 걸어두고 있다.
나의 법호를 경월(鏡月)로, 아들의 법호를 금강(金剛)으로 지어주신 도영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셔 자주 찾는 완주 송광사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위패를 지장전에 함께 모셔놓았다.
불교와의 인연으로 여러 사찰을 다니면서 내 육신을 이끄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4년 전 혈액암을 진단받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 방하착(放下著)의 마음가짐으로 북한산 숲속을 산책하고 항암 치료를 받으며 병마를 극복할 수 있었다. 나는 평소 탐진치(貪瞋痴)의 3독(毒)을 멀리하려고 했다. 내가 분노에 다소 둔감한 것은 불교와 스토아철학의 영향도 있지만 외부적 일로 마음의 평정이 무너지지 않도록 나 나름대로 애쓴 면도 있다. 스스로 우매함을 극복하려 고금(古今)의 독서와 동서(東西) 여행을 통해 식견을 넓혀나갔다. 덕분에 어리석음은 약간 극복한 것 같지만 깨달음의 세계는 아직 요원하다. 더 늦기 전에 염불 독송을 넘어 참선 수행을 통해 확철대오(廓徹大悟)의 큰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다.
김용섭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졸업 및 서울대 대학원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치고 독일 만하임대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26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법제처 행정심판담당관, 한국조정학회와 한국국가법학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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