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트랜스휴머니스트에게 사상적 우군일까? | 포스트휴먼

불교는 트랜스휴머니스트에게
사상적 우군일까?

보일 스님
해인사승가대학 학장


불교는 첨단 과학기술의 시대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500여 년이 지난 오래된 전통이 현대의 테크놀로지가 가져온 인간관의 변화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최근 트랜스휴머니즘의 급부상 속에서 일군의 트랜스휴머니스트들에게 불교가 주목받고 있다.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 불교의 이상과 자신들의 트랜스휴머니즘 전망이 서로 겹치거나 공통된 점이 있다고 여겨져서이다. 과연 그들의 바람대로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 간에 친연성이 있을까. 최근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으며, 과학기술의 비약적 혁신 속에서 인간과 기계 혹은 세계관을 담아낼 철학으로 주목받고 있다. 불교 역사에서 전통적으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많은 유형의 종파와 학파가 존재해왔듯이, 포스트휴머니즘 또한 매우 다양하게 논의가 전개되고 있어서, 일률적으로 포스트휴머니즘의 주장과 사유 체계를 설명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고 아직 그 철학적 지형을 확정 지을 수는 없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철학과 전통 간에 소통과 융합이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은 상호 접점과 균열점을 동시에 내재하고 있다. 사실 인간의 고통에 주목하고 그 고통을 극복해 인간을 행복에 이르게 한다는 어쩌면 소박한 이상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포스트휴머니즘은 공통의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인간의 신체적 능력과 정신적 능력의 증강, 도덕적 성품의 향상을 시도하는 문제에도 상호 접합될 수 있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인 트랜스휴머니스트 닉 보스트룀에 따르면, 생체보수주의자와 트랜스휴머니스트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본다. 적어도 양쪽 모두 기술이 금세기 인간의 상태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전망에 직면한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또한 이것이 현세대에게 윤리적 함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의무를 부과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 사이에도 최소한의 이해 기반은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이고득락(離苦得樂), 즉 인간의 고통을 제거하고 행복을 얻게 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은 일견 공통의 궁극적 목표를 가진다. 그래서인지 최근 서구 학계를 중심으로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을 융합해 첨단 과학기술 시대 속에서 인류의 방향성을 모색하려는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즘” 논의가 한창이다.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즘”?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즘(Buddhist Transhumanism)”은 불교가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영향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세상의 큰 변화가 불교에 말을 걸어올 때, 불교가 어떤 대답을 해줄 것인지는 서로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어떤 면모가 이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을까. 우선 트랜스휴머니즘이 가장 중시하는 기준 중의 하나, 바로 “인간 향상(Human Enhancement)”이 거론된다.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불교도들이 열반을 향해 수행 정진하는 과정이야말로, “자아 변형”이 수반되는 것이고 “인간 향상”의 모습이라고 본다. 즉 명상 수행을 통한 자기 변형 혹은 향상을 꾀하는 불교 수행자들의 모습은 트랜스휴머니스트들에게 사상적 우군을 얻은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일군의 “불교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다. 대표적으로 제임스 휴즈를 들 수 있다. 불교 승려였던 제임스 휴즈는 현재 트리니티 칼리지 교수로서 궁극적으로 인간이 기술과 융합하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 트랜스휴머니스트이다. 그는 자신을 불교 불가지론자라고 칭하면서 인류에 대한 급진적인 기술 향상을 지지하고 특히 신경공학이 인간의 삶을 가장 많이 변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닉 보스트룀과 함께 “윤리와 신흥 기술 연구소[IEET]”를 창립하고 “사이보그 붓다 프로젝트(Cyborg Buddha Project)”를 전개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불교의 다양한 명상법과 첨단 과학기술 간의 영향 관계를 주로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신경과학 및 신흥 신경 기술이 행복, 영성, 인지 자유, 도덕적 행동 및 명상, 황홀한 정신 상태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토론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제임스 휴즈에 따르면 불교가 향후 급진적인 수명 연장 및 ‘마인드 업로딩(Mind-Uploading)’ 기술에 가장 뚜렷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직접적 반론 제기는 웨슬리 제이 스미스가 주도한다. 그에 따르면 ‘마인드 업로딩’이라는 구상 자체가 난센스이고, 트랜스휴머니즘은 무신론자의 혹은 불가지론자들의 종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트랜스휴머니즘은 허무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세계관 속에서 믿음을 찾아보려는 슬프고도 필사적인 시도라고 평가한다. 제임스 휴즈 이외에도 마이클 라토라는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이 고통의 제거와 정신 상태를 고양시킨다는 공통의 목표를 갖고 있고, 이를 위해 불교 수행에서 과학기술을 사용하지 말라는 금지 규정은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정신 능력 향상을 위한 기계적 접근 이외에 약리적 방법도 적극적으로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도 있다. 대표적으로 앤드루 펜턴(Andrew Fenton)에 따르면, 불교도들이 특정 신경 약물을 명상 수행의 보조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 반대할 필요가 없으며, 대승불교의 공리주의적 특성상 약물의 사용도 방편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생각은 최근 신경과학 기술의 발전을 토대로 인간의 도덕성 혹은 덕성 함양을 시도하는 “도덕 공학(Moral Engineering)” 분야와 연결되어, 기술의 인위적 개입을 통한 “도덕적 신경 향상” 허용 여부에 관한 윤리적 논쟁도 거세지고 있다.

깨달음을 디지털 데이터로 구현할 수 있을까? ; 좁힐 수 없는 균열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불교에 대해 드러내는 우호적 정서에도 불구하고, 불교와 그들의 전망을 연결하기에는 많은 균열점이 존재한다. 첫째,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인간의 두뇌에 첨단 신경과학 기술을 통한 도덕성 증강 개입 시도가 있더라도, 최소한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 기술적 방편이 인간의 육신이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변화의 진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하는 수단이 된다면 그것은 불교 윤리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신경과학 기술의 개입을 통한 도덕성 증강 시도는 탐, 진, 치로 야기되는 업의 발현에 대한 인위적 왜곡이자 회피이며, 불교 교리 체계 전체에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업론(業論)에 대한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 비판 없이 수용하는 태도는 경전상의 업론을 하나의 축소된 형태의 은유로 이해하게 할 것이고, 결국 그것은 불교 교리 자체의 내적 모순으로 끌어갈 것이다. 둘째, 트랜스휴머니즘의 구상에는 개별적 주체의 고통 제거와 행복에 집중할 뿐, 이른바 ‘사회성’ 혹은 ‘관계성’에 대한 전망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선불교의 안목에서 보더라도, 선 수행을 통해 “바로 지금 여기”에서 현재 순간을 온전히 집중하며 살아갈 것을 추구하는 것이지, 트랜스휴머니즘에서 추구하듯 미래의 초월적이고 초능력을 가진 인간상 구현에 주목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만약 도덕성 증강 기술을 통해 깨달음마저도 기술적으로 단시간 내에 구현할 수 있다면, 십바라밀 체계 내에서 참고 견디면서 수행하는 인욕행과 오랜 시간 꾸준히 바라밀행을 밀고 갈 수 있는 정진바라밀은 그 자체로 무의미해지는 결과가 된다. 도덕성 증강 시도를 통해 얻은 결과가 수십 년 동안의 무문관 혹은 토굴 정진을 통한 성취를 뛰어넘는다면 누구든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은 외견상 그 전망에 접합점이 있는 듯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좁힐 수 없는 균열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과학기술의 비약적 혁신이 가져온 트랜스휴머니즘이나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은 인공지능을 비롯한 첨단 디지털 데이터 기술이 단순히 공학의 영역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할 것 없이 전 영역에 걸쳐서 새로운 이해와 관점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인간 자체의 본성과 도덕성과 관련된 논의는 새로운 질문들을 해결해야 하는 난제를 떠안게 되었다. 물론 불교도 예외일 순 없다.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의 다양한 논의를 통해 불교가 새로운 시대의 언어와 서사로 새로운 담론을 선도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보일 스님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철학과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해인사승가대학 학장으로 있다. 저서로 『AI 부디즘』이 있고, 「인공지능 챗봇에 대한 선(禪)문답 알고리즘의 데이터 연구」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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