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을 알아야 불교를 안다 |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 A에서 Z까지

괴로움을 알아야
불교를 안다

화령 정사
불교총지종 정사, 보디미트라 ILBF 회장

그림 | 김아름

불교는 왜 괴로움을 먼저 말하는가?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행복을 추구한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든 사후 세계에서의 행복이든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불교도 마찬가지로 행복의 추구를 가장 우선시하는 종교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추구하는 행복은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재물이나 명예, 사랑의 획득, 건강 등과 같은 세속적 의미의 행복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수시로 변해 불교에서는 절대적인 행복으로 보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세속의 행복은 일시적이며 지속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누리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상실했을 때의 고통도 더욱 크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행복은 깨달음의 지혜로 이러한 세속적 행복을 초월해 얻는 것으로 이것을 해탈, 혹은 열반이라고 한다. 붓다께서는 세속적 행복은 참된 행복도 영원한 안락도 아니라는 것을 통찰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열반의 길을 알려주셨다. 불교에서는 인생의 참모습이 고(苦)의 연속이라고 보고 이러한 고의 완전한 해결, 즉 영원의 행복과 절대의 안락을 최종 목표로 삼고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절대적인 행복, 즉 해탈이나 열반을 얻기 위해서는 현재의 상태에 대한 불만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을 한마디로 불교에서는 ‘고’라고 한다. 즉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이 고에 대한 확실한 인식과 자각이 있은 다음에야 그것을 개선할 의지가 생긴다. 삶에서 괴로움이 없다면 개선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불만투성이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언제나 고를 가장 앞에 내세워 그것에 대해 바르게 인식할 것을 강조한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사바(sahā;娑婆)세계라고 해 괴로움이 가득한 세계, 고통을 참아야 할 세계로 보고 있다. ‘고해(苦海)’라는 말도 그래서 생긴 것이다. 불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불교가 고를 강조하기 때문에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종교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의 합리적인 면을 보지 못한 것이다. 불교는 다른 종교에서처럼 자기가 받드는 신을 무조건 믿는 것에 의해 세속적인 행복을 얻거나 사후 세계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무조건 믿는 것에 의해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고 세속적 욕망을 부추기는 종교는 술이나 마약처럼 자기 최면을 통해 일시적인 통증을 해소해 따름이다.

여기에 반해 불교는 현재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바른 인식을 통해그 개선을 꾀하고자 노력하는 실제적이고 적극적인 종교이다. 그것은 사후 세계를 기다릴 것도 없이 스스로 느끼고 알 수 있는 현실의 정확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현실을 정확하게 통찰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고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저 신에게 의지하거나 요행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인생의 진면목이 나타나기 어렵다. 괴로움이 닥쳐도 신이 자기를 시험한다거나 재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치부해버리면 속은 편할 것이다. 그리고는 신에게 기도를 하거나 재수가 좋기를 바라면서 눈앞의 조그만 쾌락에 잠시 그 고통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끝없이 이러한 삶을 되풀이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불교는 괴로움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달리한다. 불교는 지혜의 종교이며 자각의 종교이다. 불교는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뿌리째 제거하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고 있다. 과연 이 세상은 즐거움만 가득한 곳인가? 즐거움도 있고 괴로움도 있는 곳인가? 그리고 괴로움이 있다면 그 괴로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렇게 따져 들어가서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불교이다. 그저 마취제를 맞으면서 고통을 잠시 잊는 것처럼 신에게 매달려 현실을 잊으려고 하는 종교가 아니다.

현실을 냉철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실은 자기 욕망의 충족에 불과할 뿐이고, 그 즐거움은 고통의 대가로 잠시 맛보는 것이거나 아니면 더 큰 불행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이 고로 점철된 것이 우리의 한평생이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면 괴로움이라는 것이 우리 삶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나려 끊임없이 발버둥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에 매달리거나 술, 도박, 섹스 혹은 자기가 열광하는 그 어떤 것에 매달려 지내다 보면 잠시 동안은 괴로움을 잊은 듯하지만 곧 더 큰 괴로움이 밀려온다. 잠시 동안의 괴로움을 잊으려고 시도했던 노력들이 더 큰 괴로움의 원인이 되어 자기 앞에 버티고 서 있는 모습에 좌절하면서도 그런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는 것이 인간이다. 불교는 이런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벗어나려고 하는 종교이다. 그래서 불교는 괴로움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그 뿌리를 뽑을 수 있다고 본다. 붓다의 출가 동기도 사문출유(四門出遊)의 전설로 상징되는 고의 인식과 그로부터의 해탈을 지향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색·수·상·행·식의 오온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가 인간을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먼저 색은 물질적인 것을 말한다. 색은 변해 파괴되고 일정한 공간을 점하며 가로막는 성질이 있다고 정의된다. 수는 괴롭고 즐거운 것을 느끼는 작용으로서 마음의 작용 가운데의 하나이다. 상은 마음 가운데에서 개념을 형성하는 작용을 말하며 이것도 정신 작용의 하나이다. 예를 들면 이것은 꽃이다, 물이다, 책이다 하는 식으로 마음에 개념을 떠올리는 것을 말한다. 행은 마음의 움직임으로서 의지 작용이다. 식은 분별과 판단, 인식을 하는 주체로서의 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오온은 물질계와 정신계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는데, 인간에게 있어서는 신체와 정신을 아우르는 것이 된다. 즉 나라고 생각되는 이 신체와 정신이 곧 오온인 것이다. 경전에서는 오온의 각각에 대해 무상한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색도 무상한 것이고, 수도 무상한 것이며, 상도 무상하고, 행도 무상하며, 식도 무상한 것이다.

오온이 무상하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나의 몸이 어제와 같지 않고 나의 생각은 수시로 바뀐다. 어제는 좋았던 것이 오늘은 왠지 싫어지고 조금 전에는 싫었던 것이 지금은 좋아진다. 찰나에 몸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뭔가 변하지 않는 나라는 것이 있다고 집착한다. 그러므로 오온에 집착한다는 것은 무상한 것에 집착한다는 것으로 이것은 일체의 고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잡아함경』에 보면 붓다께서 사위국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색·수·상·행·식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곧 괴로운 것이요, 괴로운 것은 나가 아니며 실체로서의 나가 아니면 내 것 또한 아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일러 진실하고 바르게 관찰하는 것이라 한다.

불제자로서 이와 같이 관찰하면 색·수·상·행·식을 싫어하게 되고, 싫어하는 까닭에 즐기지 않게 되며, 즐기지 않는 까닭에 해탈하게 되니, 해탈하면 진실한 지혜가 생겨 자신이 생사와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며, 모든 잘못되고 치우친 행위를 여의어 바른 행위와 바른 정진만 하며, 할 일을 다 행해서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게 됨을 안다.

이와 같이 오온이 곧 괴로움의 근원인 것을 바르게 관찰해 알고 그것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해탈하게 되고 바른 지혜가 생겨난다고 하셨다. 오온에 집착함으로써 생로병사에 대한 괴로움과 원증회고(怨憎會苦), 애별리고(愛別離苦), 구부득고(求不得苦)의 괴로움이 발생하기 때문에 오온에 집착하는 오취온 자체가 다 고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오음성고(五陰盛苦)라고 한다. 즉 깨닫지 못한 우리의 심신 자체가 괴로움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몸뚱이를 지니고 사는 이 삶 자체가 괴로움인 것이다. 불교에서 항상 괴로움을 앞에 놓는 것은 비관적이거나 염세적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점이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이다. 병을 정확하게 알아야 치료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불교에서도 괴로움의 실체를 정확히 알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 수 있다고 본다.

불교의 대명제로서 ‘고성제’를 가장 앞머리에 내세우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것이 고를 전제로 한 불교의 현실 인식이며 현실 분석이다. 또한 이것은 실천상의 진리이기도 하다.

화령 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교총지종 교육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보디미트라 ILBF(국제재가불교포럼) 회장으로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 『불교 교양으로 읽다』, 『담마빠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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