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과 역동
바이샬리
상업의 중심지였던 바이샬리는 인류사에서 여성 출가, 대승불교의 발흥 등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정신적 진보를 이룩했던 이정표들을 간직하고 있는 위대한 정신적 요람이다. (사진은 원숭이탑 앞의 아소카 석주) |
바이샬리는 부처님께서 태어나고 깨닫고 처음 법을 설하시고 반열반하신 4대 성지에는 속하지 않지만, 법문을 하신 횟수로 볼 때는 4대 성지에 넣어도 무방할 만큼 부처님의 전법 활동이 잦았던 곳이다. 네 부의 『니까야』가 설해진 장소를 계산한 연구에 따르면(『부처님은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가르치셨나』, 일아, 2019, 불광출판사) 바이샬리의 중각강당은 『앙굿다라 니까야』는 두 번째로, 『상윷다 니까야』는 네 번째로, 『맛지마 니까야』는 다섯 번째로, 『디가 니까야』는 아홉 번째로 많이 설하신 곳이다.
또한 부처님께서 바이샬리의 전염병을 물리쳐주셨으며, 말년에 바이샬리 공화국이 멸하지 않을 일곱 가지 법을 설하시어 그 장래를 걱정해주신 곳이며, 마지막 안거를 하시고 반열반을 선포하신 곳이며, 마지막 열반길에 뒤돌아보시며 “바이샬리는 아름답구나!” 하고 찬탄하신 곳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사랑이 남달랐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 반열반 길을 따라갔던 릿차비족이 부처님의 반대로 되돌아온 곳에 세워진 탑이 바이샬리 서북쪽 50km 지점의 케사리아 불탑이다. 열반 후에 8분한 사리 중 릿차비족이 모신 것이 현재 바이샬리의 근본 불탑이다. 이곳에서 사리 대신 재가 발견되어 회(灰) 사리라고 이름해 파트나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바이샬리는 남쪽 파트나에서 갠지스강으로 흘러드는 간다키 강변에 위치하는데, 현재의 바사르 지역과 콜화 지역이다. 지금의 바이샬리는 흙길에 맨발의 구슬치기하는 아이들과 외양간으로 상징되는 가장 낙후된 시골 마을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밧지국 수도로서 사람들로 붐비며 음식이 풍요롭고, 7,707개의 놀이터와 그 수만큼의 연꽃 연못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번영한 도시였다. 기녀 암라팔리가 미모로 이름을 날린 곳이며, 자이나교 교주 마하비라의 고향이기도 하다. 『대당서역기』에도 “벌거벗은 외도들이 많은 무리를 이루고 있다”고 쓰여 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죽림정사에 안거하실 때 바이샬리에 심각한 가뭄으로 기근과 역병이 창궐했다. 부처님은 공포와 불안이 역병보다 더한 병임을 아시고 자애의 마음을 기르는 『보배경』을 독송케 하고, 시신을 치우고 거리를 깨끗하게 했다. 7일째 마침내 역병이 물러갔다.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바이샬리의 왕과 주민들이 부처님께 중각강당을 세워 보시했다.
이 강당에서 원숭이 왕이 49개의 발우 중에서 부처님의 발우를 찾아내어 꿀을 가득 담아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를 원후봉밀이라 하는데, 이를 기려 거대한 원숭이탑과 아소카 석주가 세워졌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부처님의 8대 성지에 포함되었다.
원후봉밀터의 아소카 석주는 쥬나르산의 통 돌을 깎아 만든 높이 13.2m, 직경이 1m가 넘는 것으로 사자상을 이고 파손 없이 우뚝 서 있다. 아소카왕은 이 석주를 ‘법의 기둥(Damma thambha)’이라고 불렀다. 인도 고고학 조사총국장이었던 마셜은 이를 아테네 건축의 최전성기 기술을 뛰어넘는다고 평가했다.
중각강당이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처님의 양모 마하프라자파티가 출가를 요청하면서 비구니 승단이 만들어진다. 상좌부 전승에 따르면 그곳이 바이샬리의 중각강당이다. 중각강당터에는 만(卍) 자형의 비구니 사원 기단이 남아 있다. 여성 출가를 기록하고 있는 부파는 총 일곱인데 다섯은 기원정사가 그 무대이며, 다른 한 곳은 나라다 승원이다.
부처님은 여성 불자들이 처음에는 재가에 살면서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청정한 생활을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여성이 출가해 수행하면 아라한이 될 수 없느냐는 아난존자의 질문에 여성의 출가가 허락된다. 세계 최초의 여성 성직자의 탄생이다. 여성 출가에 붙여진 8경법(敬法, 백 세 된 비구니도 갓 출가한 비구에게 예경해야 한다는 등의 여덟 가지 조항)의 조건과 정법의 단축 등의 이야기는 여성들의 출가 생활에 대한 현실적 어려움과 한계를 드러내고 있지만, 남녀의 상(相)을 떠남으로써 일체의 상을 여윈 궁극적 깨달음을 설하는 『유마경』이나 『열반경』 등 대승 경전도 여성 출가를 사상적으로 지지한다고 할 수 있다.
상업이 발달한 밧지국은 공화제였는데 그로 말미암아 바이샬리 근본불탑 앞의 카라우나 포카르 연못의 물은 지금도 인도 의회에서 공화제를 위한 성수로 사용된다. 나라가 멸망하지 않는 일곱 가지 법은 부처님께서 반열반하시기 1년 전에 설해졌다. 그 주된 내용은 소통과 화합, 전통적 권위와 종교에 대한 존중, 사회적 도덕의 준수이다. 이를 밧사카라 바라문을 통해 전해들은 아자타샤트루왕은 공격 시점을 늦추고 밧지국에 대한 이간책을 실행한 뒤에 결국 멸망시키기에 이른다. 7 불퇴법에 대한 법문은 승단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부처님께서 반열반을 선포하신 곳도 이곳의 중각강당이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방일하지 말고 성취하라
오래지 않아서 여래의 반열반이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3개월이 넘지 않아서 여래는 반열반할 것이다.
2차 결집이 있었던 곳 역시 바이샬리이다. 부처님 열반 후 100년 뒤이다. 서쪽에서 온 야사 스님이 바이샬리 스님들이 금, 은 등을 보시 받고, 소금을 절에 저장하고, 정오가 넘어 해시계 그림자가 손가락 두 마디만큼 길어져도 먹던 음식을 계속 먹는 등 열 가지 계율을 완화시켜 일어난 결집이므로 율결집이라고 한다. 열 가지 계율을 모두 원칙대로 지켜야 한다고 결론 났지만, 승단은 대중부와 상좌부로 근본 분열하게 된다. 최초의 부파 분열이다.
세월이 흘러 대승불교가 흥기할 때 『유마경』의 무대가 바로 바이샬리이다. 『유마경』은 대승불교 운동의 선언서이자,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는 심오한 불이법문(不二法門)을 통해 성문승들이 미칠 수 없는 부처님의 경지를 설하고 있다.
상업의 중심지였던 바이샬리는 로마 멸망 이후 쇠퇴한 인도의 무역과 더불어 쇠망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인류사에서 여성 출가, 대승불교의 발흥 등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정신적 진보를 이룩했던 이정표들을 간직하고 있는 위대한 정신적 요람이다.
글과 사진|각전 스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39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해양수산부에 근무하다가 궁극적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출가했다. 현재 전국 선원에서 수행 정진 중이다. 저서에 『인도 네팔 순례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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