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적 관점에서 본 우울 | 우울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본 우울

최훈동
휴앤심명상상담연구소 소장


의학에서는 우울과 우울증을 구별한다. 이미 2,500년 전 히포크라테스는 우울증과 조증을 구별해 기분이 들뜨면 조증, 가라앉으면 우울증이라 정의했다. 우울증은 일시적으로 우울한 기분과는 구별된다. 정상적인 슬픔이나 우울한 정서와는 달리 2주 이상 지나도 회복되지 않거나 반복적으로 재발해 삶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 우울증이라 진단한다. 인류의 15%(남성 5~12%, 여성 10~25%)가 우울을 앓는다고 하며 젊은 여성에 많고 전 연령기에서 발생한다. 정신과 진료실에서 불안증 다음으로 많다. 예전에는 어린이에겐 없다고 생각했으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생후 6개월 유아에게도 나타난다. 우울증은 다양한 원인과 증상을 나타내고 치료를 방치하면 사회적 손실이 막대하므로 정확한 이해와 진단이 필요하다.

증상
우울증은 감정, 사고, 신체, 그리고 행동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기분이 저조해지고 슬프고 암울한 감정이 지배하면 삶에 대한 흥미 상실, 의욕 상실로 이어진다. 무기력감과 에너지 소진을 호소하기도 한다. 짜증과 과민성 증가도 나타난다. 공허함과 허무감, 무가치함에 의해 세상이 회색빛으로 보인다. 자존감과 자신감 저하로 모든 게 자신이 없고 아예 일을 꾀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어둠의 터널은 끝이 없고 희망의 불빛은 아득하다. 오전에 심하고 오후 늦게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비관적 혹은 염세적 사고 등 부정적 사고가 지배한다. 건강에 대한 과도한 염려,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상황에 대한 비관적 예측 등이 대표적이다.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겨 자책이 심하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심하면 극단적 생각(자살 사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질병 망상, 빈곤 망상, 죄업 망상으로까지 발전시킨다. 잠들기 어려운 불안증과 달리 우울증 환자는 잠을 깊이 유지하지 못하고 일찍 깨는 불면을 호소한다. 반대로 잠만 자려는 경우도 많다. 우울증의 90%에서 불안 증상이 동반된다. 집중력 저하나 착각 등 인지 장애를 호소해 업무 수행 처리가 지연된다. 식욕 저하나 성욕 상실도 흔하며 반대로 음식 섭취에만 집착하는 경우도 있다. 과도한 음주나 흡연, 약물 등에 의존하기 쉽다. 행동상으로 말이 줄고 주위에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어서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가족 관계도 소원해진다. 밝은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어두운 표정에 세상의 온갖 시름을 혼자 다 안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실제로 탈출구가 없는 절망 상태라고 결론짓고 치료 기회도 거부해 우울증 환자의 20%만 병원을 찾는다. 신체적 증상(두통, 가슴 답답, 소화불량, 전신을 옮겨가며 나타나는 이상 증세 등)으로 나타나는 경우 여러 병원이나 치료법을 찾아다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우울증을 방치하면 3분의 2가 자살을 시도하고 자해 행동을 하며 10% 이상이 자살을 결행한다. 동반 자살과 영아 살해도 드물지 않아서 사회적으로 큰 손실과 위험을 주므로 적극적으로 치료해주어야 하는 질병이다.

원인
심리적 원인과 환경적 요인 외에 유전적 요인과 생물학적 원인을 들 수 있다. 심리적으로는 실패와 상실과 유관하며 분노의 억압과 관련이 있다. 부정적 사고의 결과로도 설명한다. 문제를 과장해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어 조그만 문제를 극단적 상황으로 확대시킨다. 외부에 순응하려 애쓴 나머지 에너지 소진이 일어난다. 자신의 개성을 살리지 못하고 자신이 집착해온 사회적 평가에 민감해 한계에 봉착하면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동안의 삶이 모두 무너지고 전체가 부정되는 느낌에 시달린다. 코로나 사태처럼 사회적 요인이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일란성 쌍생아의 발병률이 60%가 넘어 유전적 소인이 있다. 그 밖에 햇빛이 부족한 겨울철이나 북쪽 지방에서 우울증이 많다.

진단
가장 흔한 우울은 실패나 상실에 따르는 감정 변화이다. 가까운 사람을 잃은 경우 애통해하는 기간이 6개월 이상 지속된다면 우울증이라 할 수 있다. 심리적 트라우마에 의한 경우도 3개월 이내 회복되지 않으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진단된다. 이 경우 불안과 우울이 겹쳐서 여러 정신과적 증상을 함께 보이는 경우가 많다. 정신의학적으로 기분 부전과 주요 우울증으로 나누기도 하고 양극성 우울증과 단극성 우울증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신경증적 수준의 우울과 정신병적 우울로 나누기도 한다. 신경증과 정신병은 병식(병에 대한 인식 여부, 불편하거나 이상하다고 자각하는지 못하는지 여부) 유무에 따라 구별된다. 신경증 수준은 자신이 불편해 스스로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치료를 꾀한다. 정신병 수준은 병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고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경우이다. 반응성 우울증과 내인성 우울로 나누기도 한다. 심리적 환경적 원인에 이어 반응하는 우울과 딱히 원인을 찾을 수 없는 호르몬성 우울증이 있다. 산후 우울증, 갱년기 우울증 등으로 진단하기도 하고 분노를 적절히 표현하지 못하고 억압해 쌓아두면 우울이 되는 경우가 많다. 모두 치료에 긴요한 구분이다. 한때 순종을 미덕으로 여기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나타나는 문화병으로 중년 여성 주부들의 ‘화병’이 회자되기도 했다. 가면성 우울증도 있다. 신체적 무기력 피로감 여러 신체 증상이나 통증 등이 주증상이어서 우울증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각종 병원을 찾아다니게 된다. 소아기 우울은 분리(이별) 불안이나 학교 공포 등으로 나타나거나 거짓말, 도벽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사춘기 청소년의 우울증은 무단결석, 가출, 약물 남용, 알코올 의존, 성적 문란 등 품행 장애로 나타나기도 한다. 갱년기의 우울증은 신체적 질환을 가장하고, 노인성 우울증은 치매로 오인되기도 한다. 그 밖에 영적 우울이라 표현할 만한 우울도 있다. 이는 실존적 우울로 인생에서 모든 걸 다 이루고 난 후에 엄습해오는 우울이다. 매우 초조하고 자살을 결행하는 심각한 우울이다. 영적 위기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허무감과 공허함에 빠지는 게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조현병에서 동반되는 우울과 조울병의 우울을 감별 진단해야 한다.

치료
이렇게 다양한 원인과 증상을 나타내므로 세밀한 진단과 여기에 맞는 치료가 적확하게 시행되어야 한다. 심리적 문제, 환경적 스트레스 유무 등을 면밀히 파악해 객관적이면서 종합적인 시각을 갖게 하는 인지 치료가 도움이 된다. 자신의 문제가 그리 큰 문제가 아님을 깨우칠 수 있다면 희망의 불씨가 지펴지고 자신감이 살아나는 단초가 된다. 분석적 정신 치료가 필요할 때도 있다. 우울이 갖는 의미는 자신의 삶이 밖으로 치우쳐 살아왔고 내면의 허전함이 드러난 것임을 자각하고 내면으로 관심과 주의를 돌려 내외의 균형을 이루게 한다. 최근 알아차림(sati)을 기반으로 하는 명상 요법도 시행되고 있는데 필자의 경험으로는 불교의 ‘있는 그대로 알고 봄(여실지견)’과 연민 어린 바라봄, 평정한 수용이 치유 효과를 나타낸다.

심리적 치료만으로 효과가 없으면 항울제 처방이 긴요하다. 세로토닌 계통의 약이나 노어에피네프린 계열의 약, 아니면 두 가지를 모두 조절하는 항울제를 처방한다. 항울제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통상 3~4주 이상 필요하므로 신뢰와 인내가 필요하다. 반응성 우울이나 불안을 주소로 하는 경우 항불안제가 효과적일 수 있고 여러 약들을 처방해도 잘 낫지 않는 경우 도파민의 관련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 항정신병 약을 처방하기도 한다. 병식 결여나 망상 동반, 자살의 심각한 위험이 있으면 보호 병동의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

우울은 그동안 밖으로 치달려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라는 신호이며 내면 성숙의 기회이기도 하다. 또한 우울은 주위의 따스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가족이 없거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 국가가 관리해주는 사회 안전망의 구축이 긴요하다. 정신 건강은 개인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가족 혹은 주위 환경에 의해서 유발되고 또한 영향을 주는 전파력이 있다. 가족의 심리적 고통이 우울한 가정과 사회를 만들고 선망하는 연예인이나 지도자의 자살이 추종 집단 자살로 이끌기도 한다. 우울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닌 사회적 문제이므로 자비로운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

최훈동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수련했다. 한별정신건강병원장을 지냈으며 현재 서울대 초빙교수(정신치료 슈퍼바이저), 휴앤심명상상담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명상과 상담 안내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내 마음을 안아주는 명상연습』, 『깨달음의 길 숙고명상』 등이 있다.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