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에 빠지다
김태겸
수필가
코비드, 이름도 생소한 바이러스 하나 때문에 일상이 정지되었다. 강좌와 모임은 취소되고 지인들은 카톡방에서 연락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언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하기 어려웠다.
처음 몇 주는 집에 틀어박혀 흘러간 명화를 감상하거나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오래 버티기 어려웠다. 몸과 마음이 하향 곡선을 그리며 가벼운 우울 증세가 찾아왔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바깥 공기라도 쐬려고 마스크를 깊이 눌러쓰고 한강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아파트 단지에서 굴다리 밑을 지나 한강 둔치에 들어서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봄볕을 쬐려고 나와 있었다. 젊은 남녀 몇 사람이 잔디밭 깔개 위에 앉아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까르르대고 있었다. 나만 혼자 ‘보이지 않는 공포’ 속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들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마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잠수교에서 한남대교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오래전 마사이 워킹법을 익혔다.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산기슭에 사는 마사이족은 하루 40Km 이상을 맨발로 걸어도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다리를 길게 뻗어 디딘 다음 발뒤꿈치가 먼저 바닥에 닿도록 하고 발바닥 측면으로 땅을 구르고 엄지발가락으로 힘껏 밀어낸다. 팔은 리듬에 맞춰 가볍게 흔들어주면 된다. 걸으면서 발걸음 하나하나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혼자 걸을 때 나는 몸을 우주선이라고 상상한다. 영혼은 우주선을 타고 있는 승객이다. 눈이라는 창문을 통해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한다. 익숙한 광경도 처음 본 것처럼 감동하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인간은 우주에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살아 있는 동안 살아 있음을 만끽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러면 걷는 것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얼마 전, 둔치길 옆에 새하얀 강상(江上) 건물이 생겼다. 무슨 건물을 지을까 궁금했는데 완공하고 나서 현판 붙인 것을 보니 서울웨이브아트센터였다. 한강 변에 예술 공간이 늘어나 반가웠다. 카페와 전시장이 있어 정기적으로 기획전을 연다고 한다. 마침 <환상의 에셔(Escher)전>을 하고 있었다. ‘에셔’라는 화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구경해보기로 했다.
부교를 건너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나는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그림들에 깜짝 놀랐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보았던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 그림이 그의 판화였다. 계단은 이어져 올라가고 있는데 위 계단이 다시 아래 계단과 전혀 어색함 없이 연결되어 있다. 손 하나가 손을 그리고 있는데 그 그린 손이 다시 그리고 있는 손을 그리고 있다. 검은 새가 왼쪽으로 날아가고 있는데 다시 보니 흰 새가 오른쪽으로 날아가고 있다. 눈의 착시 현상을 이용해 반복과 순환을 통해 수수께끼 같은 공간을 창조했다.
화가는 이 그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무시무종(無始無終)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눈에 보이는 것은 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뜻을 담고 싶었던 것일까. 얼마 전 읽은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라는 양자물리학 책이 떠올랐다. 워낙 어려워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우주에 있는 것이라고는 양자와 시공간뿐인데 인간 의식이 형상을 만들어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했다.
전시장에는 가상현실(VR) 체험방이 있었다. 언젠가 용산 아이파크몰에서 딸 가족과 함께 식사를 마친 후 사위와 가상현실 게임을 한 적이 있었다. 조그만 방에서 사위와 나는 전자총을 들고 마주 보고 있었다. 까만 고글을 쓰고 눈을 뜨니 괴수와 좀비가 사방에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사위는 왼편, 나는 오른편을 맡아 정신없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 순간만은 단순한 게임이 아닌 목숨을 건 사투였다. 잠깐 방심하는 사이에 눈앞에 다가온 좀비를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이제 잡아먹히겠구나 하고 체념하려는데 좀비가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사위가 대신 총을 쏜 것이었다. 게임 중이었지만 사위가 내 생명의 은인처럼 느껴졌다. 게임을 마치고 나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정말 사경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호기심을 누를 수 없어 안내자가 주는 고글을 썼다. 어느새 나는 중세의 박물관으로 가는 나룻배를 타고 있었다. 앞을 보면 뱃머리가 보이고 뒤돌아보면 선미가 보였다. 사공이 배를 저어 박물관 입구에 도착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니 높은 박물관 천장이 보이고 전시물이 하나씩 눈앞에 다가왔다. 유럽 여행 때 들렀던 박물관 관람과 큰 차이를 못 느낄 정도로 생생했다. 기술의 진보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결국 인간 지능으로 현실과 가상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때가 오지 않을까? 그러면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까만 커튼을 젖히고 거울 방에 들어섰다. 여러 개의 거울을 다양한 각도로 세워 내 모습이 수없이 투영되고 있었다. 실상은 하나인데 빛의 반사 작용으로 많은 허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어쩌면 나도 허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식이 나를 실존으로 오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환상의 에셔전>은 이름 그대로 나를 환상의 세계에 빠져들게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땅이 출렁거리는 듯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가상의 공간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느 영화에서처럼 가상현실을 현실로 착각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줄곧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김태겸
수필가, 전 강원도 행정 부지사, 『문학 秀』 편집인, 서초문인협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국제 PEN한국본부 회원, 수필집 『낭만가(街)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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