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의 사사무애(事事無碍)와 과학 이론 | 불교와 과학의 세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화엄의 사사무애(事事無碍)와 과학 이론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山山水水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 문장은 당나라 임제 의현 선사의 선시(禪詩)의 한 부분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성철 스님에 의해 잘 알려지게 된 멋진 구절이다. 세상사의 시시비비에 얽매이지 말고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보면,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라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깊이를 뚫는 명료한 가르침에 철학의 논리 분석 방법론을 적용하려 시도한다면 선문(禪門)의 많은 분들이 뜨악해하겠지만, 한 번쯤 그리해본다고 그다지 나쁠 것은 없겠다. 본고에서는 화엄4조 청량징관의 사종법계설(四種法界設)과 현대 과학철학의 관점으로 이 구절을 분석해보겠다.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산은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다. 우리는 보통 그러한 산의 실재(實在)와 그 자성(自性)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다른 만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물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징관의 사종법계 가운데 첫째인 사법계(事法界)를 구성한다. 그런데 우리가 만물이 공(空)하다고 보는 중관(中觀)의 관점을 도입해 산과 물을 다시 보게 되면 그것들이 모두 자성이 없어 공하게 다가오게 된다. 사종법계의 두 번째인 이법계(理法界)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공의 이치가 모든 사물에 적용되고 있으니, 공한 상태로 있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理)와 사(事)는 서로 걸림이 없어서 사종법계의 셋째인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산과 산, 물과 물, 그리고 산과 물은 서로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는다. 시시비비는 염오에 물든 마음이 그릇된 상(相)을 만들어 사물을 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을 뿐, 산과 물은 서로 걸림 없이 존재한다. 징관이 설파하는 사종법계설의 최종 단계인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가 여기에 해당한다. 나는 임제의 구절을 징관의 설과 관련지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 뿐, 시시비비에 얽매이지 않아 서로 걸림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참으로 멋지다. 내가 여기서 논의를 그친다면 임제의 할(喝)과 덕산의 방(棒)에 호되게 당하지 않아도 되겠는데, 그러기에는 내가 그동안 이와 반대되는 견해를 제시하는 서양 철학 공부를 너무 오래 해온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할 수는 없게 되었다.

먼저 산과 물의 ‘시시비비’와 관련해 말장난 같지만 장난이 아닌 진지한 반대 해석을 제시해볼까 한다. 우리는 산을 무너뜨려 물길을 막을 수 있고 또 이미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다. 한편 물은 산을 깎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산과 물이 서로 시비를 걸며 싸우는 형국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산과 물의 관계를 이렇게 해석한다면 이 세계는 사(事)와 사(事)가 서로 무애한 법계가 아닌 셈이 된다. 그러나 그럴 리는 없겠다. 분명 산과 물의 관계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어서 이런 문제가 생겼을 거다. 아마도 인간사의 ‘시시비비’ 개념을 자연에 투사하다 보니 생긴 오류일 것이다. 그래서 다른 해석을 도입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현대 과학철학이 이와 같은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불교와 과학’을 주제로 한 이 연재에서 지금까지 나는 과학 이론은 근본적으로 한동안 유용하게 쓰이는 도구, 즉 일시적인 가설의 체계에 불과하다고 논해왔다. 이론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관점을 제공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고유한 자성을 지니고 우리에게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전해주는 불변의 도구도 아니다. 과학의 역사가 증명해 보여주고 있듯이, 이론이란 자연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기 위한 가설의 체계로 도입되어 사용되다가 새로운 문제에 부딪혀 쓸모가 없어지게 되면 새로운 가설의 체계로 대체되기 마련이다. 한동안 잘 썼던 연장도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면 고철로 폐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불교는 과학 이론에 어떤 자성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고 이론을 그저 우리 언어와 개념으로 된 가설의 체계일 뿐이라고 보는 유명론(唯名論)의 입장과 잘 어울린다.

그런데 개념의 체계로서의 이론이 충족해야 할 필수적인 요건이 있다. 이론을 이루는 각각의 법칙과 또 그 법칙을 이루는 개념들은 그 내용이 논리적으로 서로 상충되어서는 안 된다. 이론 안의 이런저런 주장들은 논리적으로 서로를 도출할 수 있도록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내용이 일관적이어서 서로 논리적으로 모순되면 안 된다. 이런 모든 요건을 갖추어야 그 이론이 정합적(整合的, coherent)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데, 이 정합성은 어떤 과학 이론도 이론으로서 충족시켜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이론 안에서 개념들과 주장들이 서로서로를 도출할 수 있다는 말은, 연기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불교의 입장으로 표현하자면, 이론의 모든 부분이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다는 의미다. 정합적인 이론 체계 안의 모든 것은 서로 논리적으로 매끄러워 아무런 걸림이 없다, 즉 무애(無碍)하다.

성공적인 과학 이론이라면, 특히 그것이 물리학 이론이라면 수학적으로 구성된 그 체계가 정합적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물리학은 원칙상 (물질)세계의 모든 대상을 가장 근본적이고 포괄적으로 하나도 남김없이 다룬다. 그것이 미시 세계의 소립자와 그 속성이든, 거시 세계의 빅뱅이든, 아니면 다른 차원(dimension)의 현상이든지 물리학이 펼쳐놓은 그물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모습과 그 변화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가 물리학의 개념과 방법론으로, 즉 수학적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과학 이론이 가진 정합성 안에 포섭되어 존재하는 모든 사물도 그 이론 체계 안의 개념과 법칙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정합적으로, 즉 서로 걸림 없이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 같다. 이것이 내가 화엄의 사사무애를 과학철학의 통찰을 빌려 이해하는 방식이다.

과학 이론 안의 모든 것들이 서로 무애하듯이 그 이론으로 포섭되어 존재한다고 이해되는 모든 사물도 서로 무애하다. 이제 본고의 첫머리에서 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임제의 구절로 돌아가보자. 나는 ‘산은 물길을 막고 물은 산을 깎고 무너뜨릴 수 있으니, 산과 물이 서로 무애하다고 볼 수 없다’고 논하며 이것은 사사무애가 아닌 상황이라고 반박했었다. 그런데 여기서 과학 이론을 통해 산과 물의 관계를 해석하면 이 둘 사이에 아무런 걸림이 없다고 깨끗이 이해된다. 산이 물길을 막고 물이 산을 무너뜨리는 현상은 물리학의 법칙에 의해 아주 쉽게 어떤 논리적 모순이나 개념 사이의 충돌 없이, 즉 아무 걸림 없이(無碍) 잘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과 물은 서로 무애하다. 실은 과학 이론에 의해 포섭되는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서로 무애하다.

그렇지만 내가 화엄의 사사무애가 반드시 특정 이론에 의존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위에서도 논의했듯이, 모든 과학 이론은 말과 개념으로 이루어진 가설의 체계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론은 자성을 가지고 실재하는 무엇이 될 수 없다. 비록 과학 이론을 통해 사사무애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과학 이론 자체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사무애 이해가 그런 이론에 의존한다고 볼 수도 없겠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런 가설의 체계를 통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사무애 이해가 더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사사무애가 과학 이론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 거의 정형적인 표현을 빌자면, 사사무애는 과학 이론에 의존하지도 또 의존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한편 우리는 역사상 주요한 과학 이론이 여러 번 교체되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뉴턴 역학이 가능하게 해주는 사사무애법계가 있고, 상대성 이론의 사사무애법계, 그리고 양자역학의 사사무애법계가 또 있다. 그 밖에 화학과 생명과학 이론들이 가능케 해주는 법계들도 무수히 많다. 과학 이론은 끊임없이 변하며 교체되어왔고, 현재도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과학 이론의 특성과 그 변화 과정을 통해 보는 사사무애법계는 그 안의 모든 사물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 끊임없이 변하는 공(空)한 과정으로 이해된다. 사사무애법계는 결코 하나의 전체로서 어떤 고정된 모습으로 실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사무애법계와 과학 이론 사이의 관계 또한 지극히 가변적이고 공하다. 이것이 화엄의 사사무애가 특정 이론에 의거해서만 존재한다고 볼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다.

• 이번 호를 끝으로 <불교와 과학의 세계> 연재를 마칩니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과 무아』, 『불교는 생명과학과 어떻게 만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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