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의 관점에서 본 우울 | 우울

심리학의 관점에서 본 우울

권석만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우울이라는 심리적 상태
우리 인생에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참 많다. 뜻한 바가 좌절되었을 때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잃었을 때 상실의 아픔을 느낀다.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일이 실패하면 좌절의 고통을 느낀다. 이처럼 상실과 실패에 대한 심리적 반응이 우울(depression)이다. 불교 용어로 말하면, 우울은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애별리고(愛別離苦)와 추구한 것을 얻지 못하는 구부득고(求不得苦)에 해당한다.

우울은 상실과 실패로 인해 삶의 의지가 꺾인 위축된 상태로서 다양한 심리적 변화를 수반한다. 우울 상태에서는 슬픔을 비롯해 좌절감, 불행감, 무가치감, 절망감과 같은 고통스러운 감정이 느껴질 뿐만 아니라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이 증가해 자신은 무가치한 존재이고 인생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울한 사람은 삶에 대한 의욕과 흥미가 감소해 사회적 활동과 대인 관계를 회피하며 위축된 생활을 하게 된다. 또한 식욕, 수면욕, 성욕이 감소하거나 증가하는 변화가 나타나고 소화불량이나 두통과 같은 신체적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처럼 우울은 정서뿐만 아니라 인지, 동기, 행동, 신체의 다양한 변화를 포함하는 심리적 반응이다. 이러한 심리적 반응이 심각한 상태로 오랜 기간 지속되어 일상생활의 부적응을 초래하면 우울장애(depressive disorder)로 진단될 수 있다.

우울에 이르는 심리적 과정
인생에서 경험하는 심리적 고통은 불안, 분노, 우울이라는 세 가지의 부정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불안과 분노, 우울은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우리의 생존을 돕는 소중한 심리적 적응 기제로서 진화 과정에서 발달한 것이다. 인간은 무력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부모, 특히 엄마 곁에 붙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그런데 엄마가 어디론가 떠나려 할 때, 아이는 불안을 느끼며 엄마에게 달라붙는다. 엄마가 자신을 떼어놓고 떠나려 하면, 아이는 엄마를 따라가면서 울고 소리치며 화를 내고 저항한다. 그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결국 엄마가 떠나가면 아이는 혼자 훌쩍거리다가 조용해지면서 풀이 죽은 우울 상태로 빠져든다.

엄마와의 이별이 예상되는 위험 상황에서는 불안 반응이 촉발되고, 엄마와 이별하는 과정에서는 그에 저항하는 분노 반응이 유발되며, 엄마와 이별하게 된 상황에서는 우울 반응이 나타난다. 불안은 원치 않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게 만들고, 분노는 원치 않는 상황을 되돌리기 위한 강렬한 저항을 유발하며, 우울은 원치 않는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저항 행동을 멈추고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게 만든다. 진화심리 학자에 따르면, 엄마가 떠나간 상황에서는 아이가 조용하게 위축된 상태로 우울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된다. 만약 아이가 울고 소리치는 저항 행동을 계속 나타내면 포식 동물에게 노출되어 생명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인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흔들리면 불안을 느끼면서 관계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관계 단절을 선언하면 생각을 바꾸도록 애원하거나 분노하며 저항하고, 결국 연인 관계가 종결되면 우울을 경험하며 칩거하게 된다. 사업을 하는 사람도 재정 상태가 나빠지면 불안을 경험하며 회사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부도가 나면 빚을 내거나 돌려막기를 통해 파산에 저항한다. 결국 회사가 파산해 회생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면 저항의 노력을 포기하고 우울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불안과 분노는 원치 않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심신 에너지를 최대한 동원하도록 만드는 심리적 기제이다.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심신 에너지를 투여하는 노고(勞苦)가 바로 스트레스다. 불안과 분노의 반응을 통해서 원치 않는 상황을 방지하면 우울로 넘어가지 않는다. 우울은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치 않는 상황이 발생한 최악의 상태에서 경험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심리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울의 성장 촉진적 기능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말이 있듯이, 우울은 고통스럽지만 성장을 촉진하는 기능을 지닌다. 사람들은 원치 않는 상황이 발생하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한다. 부정적 결과가 발생한 원인에 대한 판단, 즉 귀인(歸因)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실패를 자신의 잘못이나 무능 때문이라고 귀인하면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며 분노하거나 원망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 탓만 하는 사람은 성장하기 어렵다. 이와 달리 실패의 원인을 자신의 잘못이나 부족함으로 인정하게 되면 우울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지만 성장의 기회를 얻게 된다.

우울은 원치 않는 상황을 현실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원인을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으로 인정하는 뼈아픈 과정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 고통스러운 심리적 상태이다. 평소에 우리의 마음은 외부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우울 상태에서는 사회적 활동성이 감소하고 자기-초점적 주의(self-focused attention)가 증가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우울은 상실과 실패를 겪은 사람에게 밖으로 내달리는 마음을 내면으로 전환해 반성과 성찰을 하도록 촉구한다. 우울은 움직임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명상과 유사한 심리 상태를 촉발한다. 달리 말하면, 우울은 외부 세계를 변화시키기보다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우울이 성장을 촉진하는 이유는 내향적 성찰을 촉발해 내면세계를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변화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창조적 절망을 통한 성숙과 초월
불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추구한다.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인간의 필연적 운명이자 실존적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병장수를 넘어 영생을 추구하며 죽음을 회피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참으로 처절하고 집요하다.

스위스 출신의 정신과 의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는 말기 질환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심리적 변화를 조사했다. 그녀에 따르면, 말기 질환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처음 나타내는 공통적 반응은 부정(denial)이다. 부정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환자는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면 “아니야! 그건 사실이 아니야!”,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길 리가 없어”, “무언가 잘못되었을 거야”라며 현실을 부정한다. 그러나 점차 악화되는 질병 상태를 부정할 수 없게 되면 분노(anger)의 단계로 넘어간다. “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 거야?”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가족, 의료진 또는 신의 탓으로 돌리며 원망하거나 분노를 표출한다. 이러한 분노의 표현으로 자신의 병세를 변화시킬 수 없으며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만 괴롭힐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서, 환자들은 신이나 의사에게 생명을 연장해주면 보답하겠다고 간청하면서 흥정(bargaining)을 시도한다.

결국 이러한 모든 노력이 소용없음을 깨닫게 되면서 환자들은 깊은 우울의 단계로 나아간다. 절망감과 무력감에 빠져들어 대인 관계를 회피하며 혼자만의 세계에 침잠하게 된다. 이러한 우울과 절망의 과정을 거쳐 말기 환자들은 비로소 죽음과의 투쟁을 멈추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수용(acceptance)의 단계로 접어든다. 수용의 단계에서 환자들은 “이제는 죽을 수 있다”, “더 이상 죽음을 거부하지 않겠다”, “이제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는 마음 자세를 갖게 되며 비교적 안정된 침착한 정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환자들은 활기를 되찾고 가족이나 친구와 애정을 나누거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들에 집중하게 된다. 우울은 창조적 절망(creative hopelessness)을 통해서 죽음을 수용하도록 돕는다.

창조적 절망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단념하는 것이다. 그 대신 주어진 상황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소중한 것에 집중하는 심리적 변화를 의미한다. 마치 철저하게 무너진 폐허 위에서 새로운 생명의 싹이 움트듯이, 소망이 철저하게 좌절된 절망 상태에서 삶을 긍정하는 변화로 나아가는 심리적 과정을 뜻한다. 우울은 집착과 허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수용하는 성숙으로 나아가도록 촉진하는 성장통이다. 방하착(放下着)이라는 자발적 절망과 단념을 통해서 모든 집착을 내려놓아야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삶을 향유할 수 있는지 모른다.

권석만
서울대학교 심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호주 퀸즐랜드대학교에서 박사 학위(임상심리학 전공)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삶을 위한 죽음의 심리학: 죽음을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 『현대 심리치료와 상담 이론』, 『긍정심리학: 행복의 과학적 탐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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