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불교 철학적 이해 | 우울

우울의 불교 철학적 이해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일체개고, 우울하지 않은가?
우리는 늘 즐겁지만도 않고 그렇다고 늘 괴롭지만도 않다. 맑은 날도 있고 구름 낀 날도 있듯이 우리의 삶은 때론 즐겁고 때론 괴롭다. 삶이 피곤하니 괴롭고 배가 고프면 괴롭지만, 피곤하면 잘 수 있는 집이 있어 즐겁고, 배고프면 먹을 수 있는 밥이 있어 즐겁다. 내게 없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은 괴롭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은 말할 수 없이 즐겁다. 수년간 고생해서 이룩한 시험 합격도 즐겁고, 온갖 난관을 뚫고 얻어낸 취업 성공도 즐겁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즐거움과 괴로움이 함께 섞여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인생에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공존하는데, 불교는 아예 ‘모든 것이 괴롭다’는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말한다. 그래서 인생을 괴로움의 바다, 고해(苦海)라고도 하고 또 불타는 집, ‘화택(火宅)’이라고도 한다. 인생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왜 모두 괴로움이란 말인가? 불교는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을 괴로움 중의 괴로움이기에 ‘고고(苦苦)’라고 하고,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을 그것이 곧 무너져 내려 괴로움이 되기에 ‘괴고(壞苦)’라고 부른다. 즐거움이 무너진다는 것은 내게 즐거움을 주던 대상인 집이나 학교나 직장이 무너진다는 것이 아니다. 그 대상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도 그로 인해 내가 느끼던 즐거움이 무너져 내린다는 말이다.

우리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 없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 노력의 과정은 긴장이고 갈등이며 스트레스이고 고통이다. 노력을 통해 목표했던 것을 성취하면, 그 순간은 즐겁지만 그것은 짧은 한순간으로 끝난다. 성취된 것이 이미 내게 속한 것으로서 나의 기본을 이루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내게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다음의 즐거움을 위해 내게 없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고통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니 즐거움은 고통을 먹고 피어났다가 곧 다시 고통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환상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고고와 괴고를 반복하는 고해에 빠져 있으니, 우울을 벗어나기 어렵다.

탐욕과 그 좌절로 인한 우울
그러나 인생이 고해라고 해도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실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안수정등(岸樹井藤)’ 이야기가 나온다. 돌진하는 코끼리를 피해 우물 속으로 들어가 등나무 줄기를 붙잡고 매달려 있는데, 아래를 보니 뱀들이 입을 벌리고 있다. 사각거리는 소리에 위를 보니 매달린 등나무 줄기를 낮과 밤을 상징하는 흰쥐와 검은쥐 두 마리가 갉아먹고 있다. 놀라 벌어진 입 안으로 꿀이 한 방울씩 떨어지니 그 꿀맛에 취해서 금세 만사를 잊고 희희낙락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범부의 태도를 안타까워하며 수행 정진해 성불해서 ‘일체고를 떠나 구경락을 얻을 것(離一切苦 得究竟樂)’을 권한다. 그러나 범부의 입장에서는 비록 고해일지라도 그 안에서 잠시라도 웃을 수 있는 삶, 머지않아 먼지로 돌아가겠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가끔이라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삶, 그런 소박한 삶을 꿈꾸며 세파를 견뎌내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것이 인생이다. 즐겁기 위해 설정하는 목표가 많으면 많을수록, 목표 달성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삶은 긴장과 갈등, 고통의 연속일 뿐이다. 삶이 복잡해질수록 성취감보다는 좌절감, 만족감보다는 불만족이 쌓여 우울에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산업이 발전하고 사회가 진보할수록 우리는 더 우울해진다. 왜 그런 것일까? 불교는 그 까닭을 우리의 탐욕에서 찾는다.

몸을 가진 생명체로 살아가자면 살기 위해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을 원할 수밖에 없다. 욕망은 삶의 필수 조건이다. 반면 내가 원하는 것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과도하게 넘어설 때, 그래서 나의 그 과도한 욕망 추구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삶의 필수 조건이 무참히 깨어질 때, 우리는 그것을 ‘탐욕’이라고 부른다.

현대 사회는 탐욕을 부추기는 사회이다. 사람들은 무한 탐욕을 인간만의 특출한 본능, 대단한 능력이고 역량인 것처럼 찬탄한다. 어느 연예인이 100억 주고 산 빌딩이 3년 만에 200억이 되었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기사화되다 보면, 3년에 1억도 못 버는 나는 인격이 100분의 1로 쪼그라드는 느낌, 자괴감과 열패감이 들기 마련이다. 어떻게 우울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욕망이 적절한 한계를 넘어 탐욕이 되면, 인간 사회에서 탐욕은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다. 탐욕의 투쟁은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되며 대다수는 결국 욕망의 좌절을 겪게 된다. 욕망이 좌절되면 절망하게 되고, 절망은 분노를 낳는다. 분노는 탐욕의 이면이다. 그렇게 쌓인 분노는 밖으로 표출되거나 안에 쌓이는데, 전자는 싸움과 분쟁을 낳고 후자는 자기 비난과 열등감으로 이어져 결국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욕망의 무한 추구가 긍정되는 사회, 탐욕의 조절 능력이 상실된 사회에는 결국 분노조절장애 환자가 많고 우울증 환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 탐욕과 분노, 탐심(貪心)과 진심(嗔心)은 마음을 병들게 하는 독(毒)이며, 우울증은 이 독으로 인해 생긴 마음의 병이다.

우울을 넘어서는 길: 본래 마음자리로 돌아가 무명(無明)을 벗어나기
오늘날 우울증은 개인적 탐욕의 문제라기보다는 탐욕을 부추기는 사회 속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심약한 보통 사람들 사이에 바이러스처럼 스멀스멀 퍼져나가는 슬픈 기운과도 같이 느껴진다. 최상위권 학생이 압박감을 못 이겨 고층에서 뛰어내리고, 잘나가던 20대 연예인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기사를 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느끼는 우울의 깊이와 무게에 비해 우리가 붙잡고 있는 삶의 가치와 의미는 얼마나 빈약하고 무력한 것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사는 것이 고통스러워 살기 싫다는 사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인생이 우울하다는 사람, 이 사람한테 그래도 견뎌보라고, 그래도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목표 달성과 성취에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으려고 하면, 우리는 이미 길을 잘못 든 것이다. 그것이 주는 즐거움은 불꽃놀이 폭죽처럼 한순간 반짝이고 사라질 뿐이며, 우리는 언제나 충족되지 않은 결핍의 마음으로 스트레스와 우울에 시달리게 된다. 목표 설정이나 목표 성취와 상관없이 언제나 그 바탕에 있는 마음, 탐심과 진심 너머의 그 본래 마음을 발견하고 그 본래 마음자리에 머무르지 않는 한, 대상을 좇아 분주한 마음에는 어떠한 만족도 평안도 없고, 기쁨도 행복도 없을 것이다. 눈으로 나무와 별을 볼 수 있고 귀로 새소리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손으로 반가운 사람과 악수할 수 있고 입으로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면서 내게 이미 갖추어져 있는 나의 기본에 만족해하고 행복해하지 않는 한, 인생 그 어디에 삶의 위로가 있겠는가.

이 본래 마음자리를 떠나 밖에서 헤매고 돌아다니는 것이 무명(無明)이다. 본래 마음의 빛을 등지고 어둠 속을 헤매는 셈이다. 본래 마음자리를 떠나 바깥에서 돌아다니다 보면, 마음의 평안은 사라지고 대신 불안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다. 힘들여 쌓아가는 사상누각을 바라보며 노심초사하고, 각고의 노력이 헛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우울에 빠지게 된다. 기본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감각한 의식에는 아무리 더 많은 즐거움의 자극이 더해진다고 해도 결국 의식의 문턱만 높아지고 그만큼 우울의 깊이만 깊어질 뿐이다.

본래 마음자리로 돌아가 내게 이미 기본으로 갖추어진 행주좌와의 평안에 감사히 머무르는 것, 그것이 바로 우울한 어둠인 무명을 밝히는 희망의 빛이 아닐까 생각한다. 덧없는 탐욕으로부터 한발 물러나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우울을 벗어나는 첫 발걸음이 될 것 같다.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서양 철학(칸트)을,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불교철학(유식)을 공부했다. 현재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유식무경: 유식 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불교철학과 현대 윤리의 만남』, 『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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