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갈등과
불교적 해법
이병욱
고려대학교 강사
인천공항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표어가 ‘다이내믹 코리아’이다. 긍정적 의미이든 부정적 의미이든 간에 한국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고, 한국 사회의 어떤 논쟁은 이성적이고 차분한 인상보다는 뜨겁게 달아오르는 과열된 인상이 강하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가 점차 진행되면서 그에 따른 갈등 양상도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여기서는 한국 사회의 갈등 양상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거론하고자 한다. 첫째, 이념 갈등이다. 한반도는 한국과 북한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곳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북한에 대해 온건한 포용적 입장을 강조하는 쪽도 있고, 자꾸 문제를 일으키는 북한에 대해 원칙에 입각해서 강경한 입장을 제시하는 쪽도 있다.
이러한 이념적 대립은 최근에는 이른바 팬덤 정치와 맞물려 더 심화되는 경향이 있다. 최근의 상황은 어떤 이데올로기 대립이라기보다는 특정 정치인의 잘못된 행위를 어떻게 옹호할 것인지로 바뀌었다.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의 인물이라면 언론에서 무엇이라고 지적을 하더라도 무조건 감싸 안으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반면에 자신이 반대하는 진영의 인물이라면, 여러 가지 상황을 충분히 따져보지도 않고 조그마한 단서에도 크게 흥분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 정치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둘째, 세대 갈등이다. 20·30대 세대와 기성세대는 여러 가지 지점에서 충돌한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첨예한 것이 경제적 측면이다. 이미 기성세대는 여러 가지 점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데 비해서, 이제 새롭게 사회에 진출하는 20·30세대에게는 문호가 좁아지고 있다. 몇 년 전에 대기업에 들어간 졸업생이 학교에서 후배들을 만나서 나눈 대화를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이 속한 부서에 신입 사원이 들어온 것이 몇 년 전이었고, 그래서인지 신입 사원인 자신을 보려고 다른 부서의 사람이 오곤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20·30세대에게 경제적 측면에서 진입 장벽이 점차 높아진다면, 세대 갈등이 점차 심해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셋째, 종교 갈등이다. 한국은 대표적인 다종교 상황에 놓여 있는 곳이다. 그 가운데 개신교와 불교의 갈등이 점차 심해지고 있다. 작년에 필자가 조계사를 지나가고 있었을 때, 우연히 조계사 앞에서 불교를 비방하는 푯말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에게 어떤 불교인이 다른 곳에서 개신교를 홍보할 것이지 왜 굳이 조계사 앞에서 불교를 비방하는지 항의했다. 필자도 그 사람에게 같은 취지의 말을 했는데, 그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또 몇 년 전에 개신교인이 불교 사찰을 방화한 일이 있었고, 어느 신학대학 교수가 그 일에 책임감을 느껴서 사찰의 복원을 위해 모금 활동을 벌이다가 대학에서 해직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제 불교와 개신교의 갈등도 그냥 단순히 자비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수준을 점차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사회적 갈등에 대해 불교에서는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지 검토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연기의 가르침
초기 불교에서 연기(緣起)의 가르침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상호의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滅)하므로 때문에 저것도 멸한다.”
이 경전의 말에서 ‘이것’과 ‘저것’은 다른 모든 것으로 바꾸어서 대입할 수 있다. 저 사람이 있으므로 내가 존재하고, 저 사람이 없다면 나의 삶도 존립하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예를 들면 필자가 학교에서 강의하는 것은 필자의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만약 누군가 차를 만들지 않았고, 누군가 차를 운전하지 않았다면 필자의 강의 능력이 있고 없음을 따질 것도 없이 나는 학교에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것은 모든 생활 분야에 적용된다. 따라서 ‘강의’라고 하는 하나의 사건에서도 다른 사람의 간접적 도움이 없었다면, ‘강의’라는 사건은 발생할 수 없다. 만약 이처럼 나의 삶이 다른 사람의 존재에 의존해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배려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을 앞에서 거론한 한국 사회의 갈등 문제에 적용해본다. 정치적 문제에서 서로 이념을 달리하고 또 진영을 달리해서 지지하는 인물이 다르다고 해도, 결국 우리의 삶은 다른 사람의 삶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것이 연기의 가르침이 주는 교훈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존재에 대해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고, 자신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고마운 존재가 정치적 문제에서 서로 대립된 주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극단적인 갈등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연기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음으로 양으로 서로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수용할 수 있다면, 정치적 견해에서 일부 견해를 달리한다고 해도 그것이 한국 사회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극단적 경우로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는 다른 갈등 상황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율장의 여초부지법
율장(律藏)은 쉽게 말하자면 승가(僧伽)라는 승려 공동체의 규칙을 모아놓은 글이다. 이 율장에서 승가에서의 갈등, 곧 쟁사(諍事)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여초부지법(如草覆地法)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풀로 땅을 덮어서 그 위를 지나가는 사람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하는 것처럼, 다툼(분쟁)을 참회로 덮어서 수행자를 청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자신에 대한 성찰과 남에 대한 용서를 기반으로 해서 서로의 결점을 참회하고, 다툼(분쟁)과 그로 인해 생긴 모든 허물을 화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초부지법’은 다음의 경우에 사용된다. 승가의 분열이라는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판단이 설 때, 양쪽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양쪽에게 ‘여초부지법’으로 사태를 마무리할 것을 권한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면, 쟁론(諍論)을 하던 양쪽의 승려들이 한곳에 모여서 풀로 땅을 덮듯이, 서로의 잘못을 참회하고 전원의 화해를 통해서 청정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처럼 승가의 기능이 마비될 정도로 대립이 심한 경우에는 몇 가지 무거운 허물을 제외한 비교적 가벼운 허물은 양자가 화해하고 모든 것을 불문에 붙이는 것으로 다툼(분쟁)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갈등에 대해서도 불교의 ‘여초부지법’의 관점을 적용할 수 있다. 어느 정도의 갈등은 한국 사회에 긴장을 주고 역동성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너무 심화되면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다. 이때에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성찰하고 남의 주장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서 갈등하던 양쪽의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주장에서 부족한 지점을 참회하고 화해하는 것이다. 갈등이 지나쳐서 한국 사회라는 커다란 둑이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면, 이 경우에는 상대방의 작은 허물은 눈감아주는 미덕이 요구된다. 빈대를 잡는다고 초가삼간을 태운다는 말이 있듯이, 갈등이 지나쳐서 한국 사회라는 커다란 울타리가 무너지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그동안 국내에서 일어나던 사소한 대립은 수면 아래로 묻히듯이, 국가의 존립에 문제가 될 정도로 갈등이 커졌다면 이때에는 수면 아래로 묻어두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한국 사회의 갈등이 점차 심해지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불교의 해법으로 연기의 가르침과 ‘여초부지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연기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의 존재에 의존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비록 다른 문제에서 견해가 대립된다고 해도 끝내는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어느 특정 문제에 대해서는 견해가 너무 대립되어 한국 사회에 파국을 몰고 올 정도라고 판단된다면, 그때에는 ‘여초부지법’의 관점에 따라 일정 부분 양보하면서 그 주제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아무튼 성숙한 시민의식을 통해 한국 사회가 한 단계 더 진전되기를 바란다.
이병욱
한양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와 한국외대, 중앙승가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불교사회사상의 이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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