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선운산 도솔암 | 한국의 기도처, 지장성지 순례

지혜의 경계인 구름 속에 머물며
참회 정진하는 지장성지

고창 선운산 도솔암


선운산에 계시는 세 분의 지장보살
대표적인 지장 도량으로 고창 선운산의 도솔암을 손꼽는다. 그러나 도솔암뿐 아니라 선운사와 참당암까지 함께 아울러야 진정한 ‘지장 도량’의 생명력을 갖는다. 선운산에는 세 분의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옛 분들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을 만물의 구성 요소로 보았다. 선운산의 지장보살 역시 삼장(三藏) 지장보살이다. 도솔암 내원궁에는 하늘세계를 관장하는 천장(天藏)보살(보물 제280호)이, 참당암 지장암에는 지상세계를 주관하는 지지(持地)보살(보물 2031호)이, 선운사 지장보궁에는 지옥세계를 맡은 지장(地藏)보살(보물 제279호)이 각기 모셔져 있다.
선운사와 도솔암은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검단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스님은 민폐가 심한 선운산 도적떼를 제압한 뒤 이들에게 국내 최초로 소금 만드는 방법을 전수하셨다. 개과천선한 도적들이 소금 만드는 양민으로 살면서 해마다 감사의 의미로 선운사에 보은염(報恩鹽)을 바쳤다고 한다. 참당암은 서역 우진국 왕이 ‘부러’ 선운산을 찾아 보낸 경전과 불상을 의운 스님이 모시면서 위덕왕 28년(581)에 창건되었다. 선운사는 한때 89개 암자와 189채의 요사(寮舍)에 24개의 석굴에서 3,000여 스님들이 수행 정진하던 성지였다.

일본에서 명성이 자자한 선운사의 지장보살
1936년 일본으로 밀반출된 조선의 지장보살상을 거금에 구입한 일본인이 있었다. 그의 꿈속에 수시로 지장보살님이 나타나 호통을 치셨다. “내 고향, 고창 선운산으로 하루빨리 돌려보내거라.” 꿈을 무시한 소장가에겐 갖가지 우환이 들이닥쳤다. 지장보살상은 다른 이에게 넘어갔다. 여러 손길을 거치는 사이, 소장가들의 꿈속에 지장보살님은 어김없이 나투셨고, 모두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1938년, 마침내 선운사로 연락이 왔다. “제발 좀 모셔가달라.” 스님들은 히로시마로 달려가 보살님을 모셔왔다. 선운산을 떠난 지 2년여 만에 돌아오신 영험한 그분이 바로 선운사의 금동지장보살좌상이다. 두건을 두른 후덕한 형상에 인상까지 어질다. 여느 지장보살상과 달리 어떤 지물도 지니지 않은 양손에는 손금까지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선운사 지장보궁에는 지옥세계를 맡은 지장(地藏)보살(보물 제279호)이
참당암 지장암에는 지상세계를 주관하는 지지(持地)보살(보물 2031호)이 
도솔암 내원궁에는 하늘세계를 관장하는 천장(天藏)보살(보물 제280호)이 각기 모셔져 있다.

천상에서 지옥까지 중생을 교화하는 지장보살
경전에 도솔천(兜率天)은 풍요롭고 청정하며 모든 복덕을 갖춘 이상향으로 묘사된다. 미륵보살이 머무시는 곳이자 모든 불보살까지 머물며 성불하는 곳이기도 하다. 선운산 도솔암 암벽에 약 15m 높이로 새겨진 거대한 마애불상(보물 1200호)부터 친견해보자. 검단 스님이 손수 조성했다고도 하고, 검단 스님의 형상이라는 전설도 전한다. 마애불 머리 위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풍화로부터 마애불을 보호하기 위한 닫집 자리다.
마애불의 치켜 올라간 눈매나 두툼한 입술, 잘 보이지 않는 목은 아무래도 참배하는 중생을 내려다보느라 고개를 숙여서인 것 같다. 두드러지게 큼직한 손 역시 중생을 다독이기 위함일 것이다. 널찍한 가슴에는 복장 구멍이 표시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이 마애불을 미륵불로 불렀다. 미륵불 배꼽에 비결(祕訣)이 숨겨져 있어 이를 꺼내는 순간 천지개벽한다는 믿음이 번지면서 실제 비결을 꺼낸 일도 있었다. 억압당하던 백성에게 도솔암 마애불은 변혁의 세상을 꿈꾸게 하는 ‘희망의 존재’였다.
나한전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바위 위에 알짜로 지어진 전각과 마주한다. ‘도솔암 내원궁’이다. 미륵불이 계실 내원궁에는 흥미롭게도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미륵부처님이 내원궁 아래 절벽에 마애불로 계시니 내원궁 안에는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중생을 교화하는 지장보살님을 모신 것이다. 두건을 두른 지장보살상의 보드라운 미소가 참으로 곱다, 무수한 영험담을 탄생시킨 보살님이 아니던가. 정교하게 표현된 지물과 장신구, 옷 주름까지 분명 당대 최고의 불모가 빚어낸 걸작이다.
도솔암에선 꼭 산신각을 참배해야 한다. 산신이 되어 선운산을 지키겠노라 유언하신 검단 스님과 참당암을 창건하신 의운 스님이 흐뭇하게 좌정해 계시기 때문이다. 살아생전에 교화와 보시행을 실천한 스님 두 분은 어느덧 선운산 산신으로 계시면서 중생의 절절한 기도에 감응하신다.
내원궁 지장전
검단 스님과 의운 스님을 모신 도솔암 산신각

지장보살 앞에서 참회하며 발원하는 자리가 점찰법회
마애불 아래 등산로를 따라가면 참당암이 나온다. 절 이름에 뉘우칠 참(懺) 자가 들어갔으니 영락없는 지장 도량이다. 한때 대참사(大懺寺)로 불릴 만큼 선운산을 대표하는 큰 절이었다. 고려 말부터 조선 건국 초까지 장장 52년 동안, 지은 잘못을 돌아보고 참회하는 점찰법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수행자에겐 전통적으로 보름에 한 번씩 대중 속에서 계를 지키지 못함을 고백하고 참회하는 포살(布薩) 의식이 있었다. 안거를 마칠 때면 서로 격의 없이 비판하며 참회하는 자자(自恣) 의식도 있었다. 신라 이래 긴 세월 동안 지장 신앙에 입각한 참회 기도도 널리 성행했다. 하나같이 잘못을 뉘우치며 깨달음을 구하는 참회 수행법이다. 조선 시대 이후로 망자를 천도하며 내세를 관장하는 부분이 보다 강조되었지만 지장 신앙의 중심은 여전히 ‘참회’에 있다.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살아가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그럴 때면 ‘후회’가 아닌 ‘참회’로 원력을 곧추세워야 한다. 삼장 지장보살이 모여 계신 선운산을 찾아 선운사에서, 참당암으로, 그리고 도솔암까지 참회 정진하고 돌아 나올 일이다. 옛 분들이 선운산을 그냥 ‘산’이 아니라 ‘지장성지’로 가꿔놓으신 이유이다.

글|이윤수
방송작가. 문화 콘텐츠 전공으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고 (사)문화예술콘텐츠진흥원 전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연등회의 역사와 문화콘텐츠』가 있다.
사진|하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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