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 가는 길 | 나의 불교 이야기

상원사 가는 길

정세근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상원사 전경

나와 불교와의 만남은 상원사에서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 손에 이끌려 상원사에 갔는데, 웬일인지 절에서 녹두전을 부쳐줘 잘 먹고 적멸보궁에 올랐다. 길은 험하고 멀었다. 그런 높은 곳에 왜 절간을 짓는지, 그러고는 왜 사람들이 올라가는지 아리송했다. 그런데 내려오는 길에 난리가 났다. 얼굴은 물론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온 것이다.

서둘러 상원사로 내려왔는데 당시로서는 월정사로 내려갈 형편도 아니었다. 1970년에는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지프차로 가기에도 험한 길이었으니 말이다. 어머니는 허둥지둥 사색이 되었다. 내 얼굴은 두 배로 부풀었고 온몸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스님은 손가락을 넣어 다 토하게 하고는 뜨거운 방바닥에 나를 눕히고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절에 있던 꿀을 나에게 먹였다. 꿀에 버적버적 씹히는 것이 있던 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산에서 딴 꿀이니 벌집이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한숨을 잤는데 어머니가 깨우더니 큰 부처상이 있는 데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방은 높고 컸다. 어둠에 촛불만이 일렁이고 불빛에 누런 부처님은 연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야밤 대웅전의 풍경을 떠올려보라. 당신도 절을 하며 나에게도 절을 시켰다. 하라면 해야지.

이렇게 나는 종교와 만났다. 내가 살려고, 어머니의 한걱정을 옆에서 보며, 입으로는 벌집의 촉감을 느끼며, 몸으로는 뜨거운 방바닥을 견디며, 땀과 어둠 그리고 기도가 뒤섞이면서 말이다.

다음 날 멀쩡해져서 그 긴 ‘상원사 가는 길’을 내려왔다. 나에게 상원사 가는 길은 늘 이렇게 구도의, 생명의, 긴박의, 반전의, 인간의 길이었다. 스님(나는 한동안 그 스님이 방한암 선사라고 굳게 믿었다)인지 부처님인지는 나를 살렸고, 병마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어머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두 눈만 멀뚱히 뜨고 있었고 말이다.

두드러기는 내 삶에 강적이었다. 복숭아를 비롯해서 사과도 먹지 못했다. 내 체질과 같은 막냇삼촌의 증명으로 녹두에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은 노력해서 된 것인지, 체질이 변한 것인지 몰라도 가리지 않고 다 먹는다. 나름대로는 조금씩 먹어가며 정말 많이 노력했다.

사실 두드러기가 일어나는 음식은 내 혀가 다 안다. 일단 입맛에 안 맞고 입술이 도톨도톨 부풀어 오른다. 과일이야 반응이 빨랐지만 녹두전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20대에 두드러기를 극복하고 먹었던 녹두 아이스바의 달콤한 맛은 잊을 수 없다. 유학하던 학교 농대에서 만들던 아이스바였는데 녹두가 더위를 식힌다고 했다. 가끔 사 먹던 녹두 바는 그 시절의 작은 위로였다.

1980년대 대학은 군부 독재의 횡포 아래 좌우 이데올로기가 대립하고 있었다. 요즘 나는 그때를 ‘과잉 이데올로기의 시절’이라고 부른다. 당시 우리는 절실했고 억울했고 분노에 차 있었지만, 그들은 우리를 서슴없이 빨갱이라고 불렀다. 군부 정권의 농간에 놀아난 우리는 서울역 시위를 하려고 완성되지도 않은 원효대교 공사판으로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시청 앞 플라자호텔 1층 유리문이 경찰에 밀린 시위대에 뒤로 자빠지고, 최루탄에 눈물 콧물 흘리는 나에게 지나가던 젊은 여인은 하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나의 머릿속에는 이데올로기가 알레르기라는 말과 함께 떠오른다. ‘이데올로기와 알레르기(두드러기)’, 나의 내용 없는 화두였다. 내 몸에 알레르기가 없어지는 것처럼, 내 머릿속에 이데올로기도 없어져야지, 뭐 그런 거였다. 이데올로기는 나에게 두드러기처럼 다가왔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의 오직 하나의 원칙은 ‘이데올로기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명예와 돈보다는 깨달음이 뭔지 알고 싶었다. 중학교 때 절대자의 엄습 같은 신비 체험을 하면서 고등학교 입학 전에 산에 올라가 밤을 새웠는데, 절대자는커녕 눈이 빛나는 짐승이 에워싸는 것을 보고 새벽녘에 간신히 내려와 절간 처마에서 이슬을 피한 것이 떠오른다.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추위라는 생각이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그러면서 나는 불교가 무신론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무신론을 종교화한 불교가 정말 위대하다고 느꼈다. 인도에는 신 없는 종교도 참 많더라는 것은 나중에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차르바카(먹는 것만이 참이다)와 같은 유물론 학파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한국의 불교는 부처가 너무 신격화되었다는 불만에 절에 가도 절도 안 하고 그랬는데, 참으로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

내 책 『윤회와 반윤회』는 한마디로 ‘윤회를 버리고 연기를 잡자’는 주장으로 인도 전통 사상인 윤회를 극복하고 내놓은 붓다의 무아설에 초점을 맞춘 글이다. 윤회와 무아가 모순된다는 논의를 정리하다가 길어져 책이 되었다. 대승불교 시절에 들어오면서 불교가 힌두교화하면서 ‘불교가 자연사했다’(머니어 윌리엄스)는 의견도 받아들여 힌두의 『바가바드기타』의 아류(라다크리슈난)가 되어버린 우리의 불교를 탓하고 또 탓했다. 제발 청년 싯다르타의 깨우침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면서, 평등사상의 불교와 아직도 카스트가 남아 있는 힌두교를 철저히 구별하지 않으면 불교는 그 독자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런데 나에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절에 가도 절도 안 하던 내가 어느덧 절을 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불교에 두드러기가 나지 않는다. 그러려니 한다. 내 책을 받아본 방장께서는 ‘윤회가 없으면 절이 어떻게 먹고사냐?’고 큰스님답게 말씀을 하셨단다. 불교가 그래서 크다.

“독자들이여, 불교가 맘에 안 드십니까? 맘껏, 힘껏, 목청 높여 욕하십시오. 불교는 그래도 될 만큼 큰 종교랍니다.”

다시금 스무 살 겨울에 홀로 상원사 가는 눈길을 걸은 것처럼, 나는 오늘도 꿈결에서 그 길을 오른다.

정세근
국립대만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사)한국철학회 제53대 회장, 국가미래교육을 위한 전국철학회연석회의장을 맡고 있다. 워싱턴주립대와 대만 삼군대에서 강의했고, 대동철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노장철학과 현대사상』, 『윤회와 반윤회』 등이 있다.

댓글 쓰기

0 댓글